아내와 이혼 한 뒤에도 별 탈 없는 생활이 이어졌다. 외국에 나가서 살고 있는 딸은 몇 년 전에 오붓한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결혼식장에서 딸의 손을 잡아주지는 못했지만, 딸과 종종 연락을 하며 지내기는 했다. 딸에게도 이제는 귀여운 딸이 생겼다. 아내와 이혼한 이후로 자주 만나지 못해서일까, 딸도 이제는 삼십 대 중반이 되었지만 내게는 여전히 아이가 아이를 낳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나이 들어 한 가지 취미가 생겼다. 바로 철새들을 사진에 담는 것이었는데, 조금 더 가까이 조금 더 많이 새들을 담고 싶은 마음에 딸이 결혼한 바로 그 해에는 낙동강 하류로 이사까지 왔다. 사실은 이사를 결정했을 때, 아내가 지금 이 곳에 살고 있다고 들은 것을 조금 염두에 두기도 했었다.
“왜? 왜, 할아버지. 한국, 눈 오는 나라!”
“민주야, 거 가만히 있지만 말고 유리한테 여기 따뜻해서 눈 안 온다고 영어로 설명 좀 해 줘 봐봐.”
나는 매년 설날만 되면 난감한 상황에 처하곤 했었다. 손녀가 태어난 이후로 딸은 일 년에 한 번, 설에만 내 집에 다녀가곤 했는데, 겨울이 없는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나고 자란 손녀딸은 부산에서 항상 눈을 찾는 것이었다. 여섯 살 배기 손녀딸은 부산에서는 좀처럼 눈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눌한 한국어로 매년 눈을 보여 달라 보채다가 종국에는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한층 더 난감한 상황이 찾아왔다. 딸이 돌연 유리만 내게 맡기고는, 제 남편이랑 아내의 집에 다녀오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손녀가 잠든 사이, 딸과 사위가 슬그머니 집을 나섰다. 유리는 역시나 일어나자마자 눈을 찾기 시작했고, 나는 유리의 손을 잡고 딸이 사전에 일러 준 장소로 향했다.
유리가 신이 나서 하도 뛰어 다니는 통에 나는 혹여 유리를 놓칠까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부산시민이 된지도 어느 새 칠 년 차인데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다. 내가 종종 철새 사진을 찍으러 오던 생태공원에 부산에 단 하나 뿐인 눈썰매장이 열린 것이다.
눈썰매장은 눈을 찾으러 나온 아이들로 가득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한 눈에 봐도 예쁘장한 혼혈아인 유리를 보고 연신 감탄사를 터뜨렸는데, 나는 손녀 애의 보호자인 것이 마냥 어색하기만 했다. 일 년에 꼭 한 번 밖에 못 보는 아이인지라 손녀에 대해 아는 것도 거의 없었고, 무엇보다 철새처럼 아이도 곧 제 부모를 따라 내 손을 떠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손녀와의 첫 외출인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부끄럽기도 했다.
“할아버지! 여기!”
슬로프를 미끄러져 내려오며 손녀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아이는 신이 난 모양이었지만, 할아버지 되는 입장에서는 불안하기만 하다. 나는 손녀가 넘어질세라 얼른 썰매가 오는 쪽으로 달려가 손녀를 받아 안았다.
그런데 손녀 쪽으로 달려오다가 발걸음을 멈추는 한 사람이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그 곳에는 이십 여 년 동안 자글자글하게 주름이 져 버린 아내가 서 있었다.
사위는 떠나기 전에 내 손에 먼 타국의 이름이 적힌 비행기 티켓 두 장을 건네주었다. 그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황망한 표정으로 서 있으려니, 딸애가 다가와 티켓을 쥔 내 손을 잡으며 가만히 말을 걸어 왔다.
“아빠, 있잖아. 옛날에 엄마는, 한 번쯤은 아빠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고 집에 찾아 와 주기를 바라고 있었어. 아빠가 돌아와야 할 곳이 언제나 우리 집으로 정해져 있었으면 했었어.”
그 날, 아내는 딸과 사위를 따라 왔던 자리에서 나를 마주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던지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하지만 나는 인파를 헤치고 있는 그 뒷모습에서 미움이나 경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설렘이나 사랑은 더더욱 아닌 미묘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내게도 그렇듯이 아내에게도 아쉬움이 깊게 남았으리라. 제가 사는 낙동강 하류에 어느 새 나도 흘러들어 있던 것을, 아내가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가로운 오후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언젠가 가야 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직접 받아보니 기분이 묘하다. 언젠가 입영통지서를 받으면 부모님께 호들갑을 떨며 알리고 친구들에게 진짜 사나이가 된다며 자랑을 늘어놓을 것만 같았으나 막상 받아보니 조심스럽다. 일단은 책상서랍에 넣어둔다.
머리를 먼저 깎아야하나, 어떻게 기른 머리카락인데. 아니다. 여자 친구에게 말해야 하나 고민된다. 헤어지자고 하면 어쩌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대한민국 남자라면 국방의 의무는 당연하건만 새삼 우리나라가 전시중임을 깨닫는다. 분단 그리고 전쟁 상황이라는 것. 그리고 나라와 국민을 지켜야 한다는 것. 이맘때 남자들도 이런 기분일까? 괜스레 이등병의 편지를 흥얼거려본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뭉클하다.
한 달 남짓의 시간이 남았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고민된다. 문득 옛날 강원도 철원에 갔었던 생각이 난다. 유난히 군부대가 많았던 곳. 차가운 바람이 서늘하게 감돌지만 따뜻했던 곳이 철원이다.
철원 땅을 밟았을 때 서늘하지만 맑은 바람을 스읍하고 마셔보았다. 상쾌하다. 머리를 짧게 자른다면 조금 추웠을 날씨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엔 더 없이 좋은 날씨였다. 나는 유원지에 놀러 가면 재미삼아 소총으로 인형을 맞추어 보곤 했다. 그런데 이제 얼마 남지 않아 실제 총을 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다시 찾은 철원은 여전히 고요했다. 물이 흘러가는 소리 그리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곳은 수십 년 전 총성으로 가득했던 곳. 지금도 그 기운이 남아있는 곳이지만 총성의 여운보다는 그리움과 안타까움의 물결이 번지는 곳이기도 하다.
철의삼각전적지관광사업소를 시작으로 안보관광을 떠났다. 두 번째로 들린 곳은 제2땅굴로 한국군 초병이 경계 근무를 서던 도중 땅속에서 울리는 폭음을 듣고 굴착 끝에 발견한 땅굴이었다. 북한의 기습 남침용 지하 땅굴로 땅굴을 살펴보니 앞으로 군 생활을 미리 만나보는
세 번째로 들른 곳은 철원 평화전망대였다. 남북의 그리운 석별의 정이 녹아있는 평화전망대는 북녘 땅의 북한군 초소를 볼 수 있으며 철새들의 쉼터가 되어주는 토교저수지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새들은 자유롭게 남과 북을 오고갈 수 있겠지라고 생각해본다.
남자가 군대를 다녀오면 왜 진짜 사나이가 되었다고 말할까 생각해본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묵묵히 시간을 보내기 때문일까. 아니면 모르는 사람이지만 국민이라는 이유로 목숨 바쳐 훈련하고 전투를 하기 때문일까.
철원에서 다시 서울로 내려오는 기차에 올라탔다. 기차에 올라타고 잠시 생각해본다. 이 기차가 마지막으로 본 월정리역에 있던 기차라면 어떨까. 만약 정말 이 기차가 서울행이 아닌 저 북쪽의 어딘 가라면.
힘찬 경적소리가 울리고 기차가 움직였다. 눈을 감았다. 오롯이 기차의 움직임만을 느꼈다.
어디로 가는지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고 방향을 생각하니 뒤로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다.
짙은 풀색의 비니를 벗고 머리를 매만져본다. 까끌까끌하다.
집에 도착한 나는 식탁에 입영통지서를 올려놓았다.
그것은 우리 가족에게 계획된 마지막 여행이었다. 여섯 살짜리 딸아이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알지 못해서인지 김밥을 싸 가자고 성화였다. 잠이 많아 아침마다 깨워서 유치원에 보내기가 그렇게 힘들었던 아이가 나보다도 일찍 일어나 고사리손으로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남편은 아직 자고 있는 것 같았다. 딸아이가 아빠를 깨우겠다며 쪼르르 건넛방으로 달려갔다.
“마지막으로 민주가 가고 싶다고 했던 섬이나 다녀오자. 텔레비전에서 본 이후로 벌써 열 번도 넘게 조른 것 같아.”
나는 목소리가 떨려오는 것을 꾹꾹 참으며 말했다. 사소한 일로 시작된 다툼이 어느새 산불처럼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 있었다. 그게 무엇 때문이었더라, 아마 설거지나 빨래 같은 아주 사소한 문제였던 것 같다. 각방을 쓰게 된 지도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고, 하루 종일 말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은 날도 허다했다. 다른 건 다 괜찮았다. 우리 둘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점점 더 소극적인 성격이 되어가는 민주를 두고 보기가 힘들었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는지, 먼저 이혼을 제의해 왔다. 이상하게도 그때 내게는 딱히 이혼을 거절할만한 구실도, 이유도 떠오르지 않았다.
섬에 다녀온 뒤에 이혼 서류 같은 것들을 정리하고, 민주에게도 엄마 아빠의 결정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이번 여행은,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 마지막 여행이 될 터였다.
서울에서는 두 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장고항에서 고작 십 분. 배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섬이라기에 민주가 멀미를 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장고항에서 섬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국화도. 생각할수록 기억하기도 쉽고 참 예쁜 이름이었다. 고작 여섯 살밖에 안 된 민주도 텔레비전에서 한 번 본 섬 이름을 기억하고 한 달이 넘게 국화섬에 데려가 달라고 졸랐을 정도니까 말이다. 국화도는 바다 위에 떠 있는 한 송이의 국화처럼 작았다. 민주가 옷소매를 잡고 늘어지며 외쳤다.
“엄마, 나 토끼섬!”
토끼섬이 뭔가 했더니 도지섬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남편이 민주를 안아 올려 목마를 태워 주었다. 민주는 신이 나서 토끼섬, 토끼섬 하고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른다. 국화섬은 세 개의 섬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지만, 세 개 중 가운데에 있는 가장 큰 섬을 이르는 말이기도 한다고 했다. 위성을 거느린 행성처럼, 썰물 때에는 도지섬과 매박섬으로 가는 길이 모두 열린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도지섬으로 향하는 길에 만난 아주머니 한 분이 도지섬에 가는 것을 만류하신 것이다.
“지금 가면 안 될 텐데. 지금 밀물이라 들어가면 못 나올 수도 있어요. 잠깐 물놀이하면서 썰물 때까지 기다려 봐요.”
밀물이었다. 민주가 토끼섬 못 가냐며 울먹이다가, 끝내는 울음을 터뜨렸다. 남편도 나도 당황하여 일단 민주를 달랬다.
“민주야, 아주머니 말씀대로 좀 이따 썰물 때 가면 되잖아. 응?”
민주는 밀물이 싫다며 막무가내였다.
울다 지친 민주를 남편이 안아 재우는 동안 머리를 식힐 겸 산책을 나왔다. 나는 그때야 안내문을 제대로 들여다보았다. 도지섬은 지대가 높아 밀물 때에만 길이 끊기고, 매박섬은 지대가 낮아 썰물에만 길이 열린다고 한다. 남편과 나, 그리고 민주도 밀려오는 파도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한다. 나는 도지섬이 될까, 매박섬이 될까. 나는 왈칵 울음이 쏟아져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민주는 국화섬처럼, 도지섬과도 매박섬과도 매번 이별을 되풀이하며 살게 될 것이다.
뒤따라 나온 줄도 몰랐던 남편이 달려와 나를 일으켜주었다. 왜 우느냐고 묻는 남편에게 나는 조금 전의 민주가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보, 밀물이야.”
“엄마 왔어. 짜잔! 우리아들이 좋아하는 호두과자!”
“야호! 신난다. 우리 엄마 최고!”
“우리 민수 퇴원하면 엄마가 호두과자 더 많이 사줄게. 혼자 심심하고 무서웠을 텐데도 잘 참아줘서 고마워. 사랑해 우리 아들!”
“정말? 정말이지? 수술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호두과자 많이 먹을 날도 얼마 안남은거네? 맞지? 응?”
“그래, 우리 아들 똑똑하네.”
무균실 밖에서 간호사가 나를 부른다. 담당 전문의의 호출이라고 했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가망이 없다니. 우리 아들이 이렇게 예쁘고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왜.’
담담한 어조로 말하는 의사의 말에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수술이 며칠 안 남았는데 도대체 왜이러시냐고 무릎을 꿇고 빌어보기도 했다. 의사는 지나치게 이성적인 말만을 내뱉었다. 의사에게 너도 자식 키울 것 아니냐며 악을 질러보았지만 의사는 이해한다는 말만 했을 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나는 아이를 가슴에 묻어야했다. 힘들어하는 나를 위해 남편은 이민을 가자고 했고 남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남편은 아이를 하나 더 갖자고 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한국을 떠나왔어도 천사 같이 웃어주던, 아프고 힘들었을 텐데도 울지말라며 손을 잡아주던 천사 같은 민수의 모습이 더욱 생생해졌기 때문이다. 한국을 떠나온 지 어느덧 40여년이 흘렀다. 여전히 나는 민수를 그리워했지만 눈물짓지는 않았다. 남편과도 민수의 생일날 이외에는 민수에 대한 이야기를 굳이 나누려하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점점 기억 속에 무뎌져 있었다.
남편의 사업 때문에 이민을 떠난 후 40년 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 분주한 사람들의 발소리 그리고 쾌청한 하늘 무엇보다 한국어로 이야기 하는 사람들까지 모든 것이 그대로인 듯 했다. ‘변한 것이 없구나. 나 밖에’ 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런데 어쩐지 주위에 호두과자 전문점이 눈에 띄었다.
‘호두과자. 우리 민수가 참 좋아했는데. 퇴원하면 양손 가득 넘치도록 사준다고 약속했는데.’ 40여년만의 기억이 파르르 떨렸다.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했고 민수와 이별하던 날 그리고 현재의 시간이 맞물리는 것만 같았다.
딸랑 거리는 현관문 종소리가 울리고 친절해 보이는 점원에서 호두과자 한 봉지를 주문했다. 갓 담겨 나온 호두과자는 따뜻했다. “우리 민수 손처럼 따뜻하네.”내가 봉지를 받아들며 속에 있던 혼잣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한가로운 공원에 한참을 앉아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마나 뛰어놀았는지 머리가 땀으로 다 젖도록 뛰어놀던 아이를 아이의 엄마가 찾으러 왔다.
“이제 그만 가자. 배 안고파? 점심도 안 먹고 이렇게 뛰어놀게.”
“배고파. 엄마, 근데 나 저기 할머니가 들고 있는 호두과자 먹고 싶어. 나도 사다줘. 응? 엄마~”
“집에 가서 밥 먹어야지 무슨 호두과자야. 얼른 가자. 엄마 지갑도 안가지고 나왔어.”
“싫어, 나 호두과자, 호두과자~”
엄마에게 떼를 쓰는 아이를 보니 우리 민수가 더욱 아련했다. 아이 엄마에게로가 먹으려고 샀는데 못 먹게 되었다며 괜찮으니 아이를 주어도 된다고, 원래 이맘때 아이들은 단 것을 좋아하나보다고 호두과자를 건넸다. 아이엄마는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아이의 머리를 콩하고 쥐어박았다.
그나저나 금방 온다고 하던 남편이 오지 않는다. 다시금 그 벤치에 홀로 앉아 있는데 어디에서 따뜻하고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남편이다. 남편의 손에는 따뜻한 호두과자가 들려있다.
둘은 아무 말이 없다. 제천 가는 버스에 올라탄 후로 둘은 아무 말이 없다. 남자는 초조하게 손가락만 주기적으로 까딱하고 있었고 여자는 창밖만 내다볼 뿐이었다. 둘은 아무 말이 없지만, 머릿속으로 스쳐 가는 생각들은 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딜 간다고? 유학?”
“그렇게 됐어.”
“그렇게 됐다니, 무슨 말이 그래? 그럼 나는?”
그럼 나는. 여자는 자신을 책임져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다는 남자의 말에 나는 너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냐를 묻는 것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행복할 것 같냐고 물었을 때.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이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둘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고 행복한 둘만의 미래를 머릿속으로 수만 번도 더 그려왔었다. 이제 그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한 여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사실 여자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그가 돌연 선택한 유학길이 아니라 ‘같이 가자’라는 이 네 글자가 남자의 입에서 나오지 않음이었다.
여자는 차마 ‘나도 같이 가면 안 돼?’라고 물을 수 없었다. 남자의 눈빛은 이미 고요했고 적막하기까지 했다. 여자는 같이 가자는 말을 잊은 건 아닌가 생각했지만 아무런 기대를 바랄 수 없는 눈빛이었다. 소리를 지르고 울어보아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여자도 알았다.
“곧 도착이야.”
긴 침묵을 깬 것은 여자였다. 여자의 말이 끝나고 난 뒤 정확히 2분 뒤 버스는 정차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좀 더 근사한 곳을 가지 왜 하필 여기냐고 했고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암묵적인 이별상태의 남녀가 마지막이라고 해서 굳이 근사한 곳에 갈 필요가 있을까? 애써 낭만적인 분위기로라도 서로의 앞날을 축복해주어야 하나 생각했다. 사실 둘의 관계가 정말 좋았을 때 분위기 따위는 상관이 없었다. 그곳이 어디든 그저 둘이 있는 곳 그거면 좋았다.
여자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차분히 그리고 애써 아무런 원망도 섞여 있지 않은 듯 이야기를 하려니 목소리가 먹먹했다.
“옛날 아주 옛날에 어떤 도령이 있었어. 선비였던 도령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중이었지. 날이 저물고 어떤 농가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는데 아주 아름다운 낭자와 마주하게 된 거야. 그런데 과거를 보러 가야 했던 도령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고 낭자를 떠나게 되었지. 아무리 기다려도 도령이 돌아오지 않게 결국 낭자는 죽고 말았대.
하지만 걱정마 나는 아주 잘 살 거니까.”
남자는 무심한 엷은 미소를 보였다. 왜 여자가 갑자기 이곳을 오자고 하였는지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남자가 말없이 여자의 손을 잡았다. 아주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기를 가지고 있었다.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마음과도 같았다. 아주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여자는 배가 고프다고 했고 둘은 근처 도토리묵 집으로 갔다. 남자는 또 겨우 도토리묵이 뭐냐고 했고 여자는 여전히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저 며칠 전 C와 만났던 일을 떠올린다. 남자가 왜 돌연 유학을 떠나기로 했는지 왜 여자에게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 C의 입에서 듣게 되었다. 그리고는 남자에게 이곳을 오자고 한 것이다.
말캉말캉한 도토리묵이 동동주와 함께 나왔다. 남자가 여자에게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이별을 결심했던 것처럼 여자도 남자에게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남자를 보내주려는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웃고 있었고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있었다. 아주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표정으로.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예쁜 꽃도 금방 시들고 아끼던 보석들도 금세 싫증 나고 마는데. 아니, 영원할 것 같던 사랑도 마음이 바뀌는 건 한순간이라고들 하는데 과연 세상에 영원한 것은 과연.
모든 것이 변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 옛날부터 사람들은 춤과 노래를 즐겼으며 그곳에는 항상 술이 빠지지 않았다. 술의 신 디오니스소 시대부터.
2차도 모자라 3차까지 가자는 진호를 극구 뜯어말리느라 택시를 잡았다가 보내기를 세 번이나 반복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줄지어 서 있는 가로수 나무에 헛구역질을 해대면서도 막무가내다. 연호는 만취한 진호의 모습이 놀랍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그저 말없이 택시에 탑승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딱 한 잔만 더 하자니까. 엉? 딱 한잔만. 아니면 노래방 갈까? 너 우리 집에서 얻어간 포도 생각해봐 짜식. 근데 술 한 잔도 더 못해? 치사한 놈”
연호는 진호의 주사를 더는 들어줄 수 없다는 듯 가까스로 잡은 택시에 구겨 넣듯이 진호를 밀어 넣었다.
진호네는 과수원을 했다. 포도농사. 장마철이면 한 해 농사를 망칠까 가슴을 졸였으며 알이 실하지 않을까 상품성이 떨어지지 않을까 늘 부모님은 사서 걱정을 했다. 진호가 서울에 올라와 직장을 갖기 전까지 부모님을 도와 포도재배를 했다. 어린아이 만지듯 조심히 다루라는 부모님의 말에 조심스럽게 포도를 땄다. 가만히 포도를 본 진호는 포도껍질에 낀 흰 당분을 보고 연호를 떠올렸다. 연호의 혀에 낀 하얀 백태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연호는 유난히 진호네 포도를 좋아했다.
원래 포도껍질에 하얗게 낀 것이 맛있거든. 바로 당분이 많이 있다는 증거야. 이런 말을 하는 와중에도 진호는 연호의 혓바닥을 바라보았다. 분홍빛과 보랏빛이 적절히 섞인 혓바닥에 낀 하얀 것을.
몇 시간 전 진호는 문득 연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녁에 술 한 잔 하자는 것이다. 할 말이 있다고. 퇴근시간의 극심한 러시아워 때문에 연호는 약속장소에 30분 정도 지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금요일임을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연호가 앉아있는 진호를 발견했을 때 이미 진호는 얼굴이 조금 붉어있었고 이미 술을 마시고 있는 상태였다.
“뭐야, 내가 조금 늦은 사이 혼자 시작한 거야?”
“그러길래 누가 늦게 오래? 약속시간도 안 지키고 말이야. 엉? 내가 클라이언트였다면 넌 꽝이야 인마. 알아? 클라이언트는 삼분도 안 기다려 준다고.”
“그래, 알았어. 근데 웬 와인이야? 너 포도 지긋지긋하다고 와인은 입에도 안 대던 애가?”
“그냥, 나 내려가서 살까 봐. 과수원 일이나 하고.”
“갑자기 왜?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은. 없었어. 그런 거.”
연호를 만나기 두 시간 전. 팀장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진호를 불렀다. 진호네가 과수원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이번 와인열차 기획에 담당으로 진호를 추천할 예정이라고 언지를 주었다. 월말에 인사고과가 있던 차에 팀장의 부름은 진호에게는 틀림없는 기회였다.
“김대리. 내가 자네 팍팍 밀어주고 있는 거 알지? 그래서 말인데…”
진호는 연호가 보고 싶어졌다. 팀장의 혓바닥에서 하얗게 낀 백태를 보아서일까.
장갑이며 목도리를 챙기지 않으면 집 밖에 나서기가 꺼려질 정도로 추워졌다. 어느 새 또 겨울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걷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손발이 얼었다. 언 손을 비비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오늘도 어머니는 일찍 잠들어 계셨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잠드는 일이 없으셨는데, 요즘 들어 기력이 많이 약해지신 것 같았다.
“저 왔어요, 어머니.”
어머니가 깨시지 않게 나지막한 인사를 건네 보았다. 식탁에는 어김없이 내 몫의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몇 달 전,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갔었다. 어깨와 허리에 잦은 통증을 느끼시는 것 같은 모습에 모시고 갔던 것인데, 병원에 갔더니 왜 이제 왔느냐는 말을 들었다. 큰 병은 아니나 젊을 때에 고생을 많이 하셔서 일찍 무리가 온 것이라 하셨다.
“저한테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그럼 빨리 병원에 왔을 텐데.”
“나이 들면 여기저기 쑤시고 그런 거지, 뭘 그런 걸 일일이 보고를 하냐.”
어머니의 말에 멍해졌다. 나는 이제야 겨우 결혼할 나이가 되었는데, 어머니는 벌써 노인이 되어가고 계셨던 것이다. 내가 걱정하는 모습이 싫어 아프다는 말을 속으로 꾹꾹 눌러 담고 계셨을 어머니를 상상하니, 코끝이 짠해져왔다.
여자 친구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번 크리스마스는 어머니와 보내기로 결심했다. 내일 저와 함께 어디를 좀 가자고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는 당연히 혼자 집에 계실 것을 예상하셨는지 아주 기뻐하셨다.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곳이 어디가 있을까 했더니, 번화가나 케이크는 아무래도 어머니에게 어울리지가 않았다.
고심 끝에 결정한 곳은 정자항. 오랜만에 어머니에게 좋은 음식을 대접 해 드리고 싶기도 했고, 겨울하면 대게였으며, 어머니도 대게를 무척 좋아하시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예요, 크리스마스니까 무엇 하나는 빨간 색이어야 하지 않겠어요?”
내 애교 아닌 애교에, 어머니가 오랜만에 환하게 웃으셨다.
휴일이라 그런지 차가 조금 밀렸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가족 단위로 북적이는 정자항에서,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수족관 안에 알이 꽉 찬 대게들이 엉켜있는 것을 보니, 대게 제철인 것이 실감났다. 저희들끼리 싸우기도 하고, 버둥거리기도 하는 모습이 정말 신선해 보였다. 평소에 자주 먹는 꽃게도 꽃게지만, 제대로 게 먹는 기분을 내려면 역시 대게가 최고다.
이왕에 먹는 거 좀 더 좋은 걸로 먹자 싶어서 박달대게를 선택했고, 젊은 시절에 바닷가에 사셨다는 어머니는 자신 있게 가장 실한 대게를 골라내셨다. 가게 2층이 바로 초장집이라 돌아다닐 필요 없이 바로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건너편에 앉은 내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셨다.
“석규야, 기억나니? 너 어렸을 때에도 여길 한 번 왔었단다. 그 때는 네 아버지도 함께 왔었는데, 아버지 손바닥보다도 훨씬 더 큰 대게가 무섭다며 네가 우는 탓에 애를 좀 먹었지. 그랬던 꼬마가 이제는 다 컸구나.”
정말로 신기하다는 듯한 어머니의 표정에 웃음이 나왔다. 그러게나 말이다. 그 때 나는 혼자서는 게를 먹지 못할 정도로 겁이 많았다. 게를 만지면 날카로운 집게발이 나를 물어버릴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어머니는 혼자 나를 키워내느라 고생을 정말 많이 하셨다. 식당 일이며, 가정부 , 청소부 일까지. 어머니가 안 해 보신 일을 찾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드디어 우리 앞에 푹 삶아진 대게 세 마리가 나왔다. 종업원이 가위를 들고 대게를 자르려는 것을, 내가 직접 하겠다며 돌려보냈다. 어머니 몫의 앞 접시에 내가 직접 손질한 대게를 한 조각씩 올렸다.
“저도 이제 다 컸으니, 안심하시고 저한테 의지하셔도 돼요.”
대게에서 김이 모락모락 오른다. 구수하고도 포근한 겨울의 냄새가 났다. 어머니는 오래도록 대게에 손을 대지 않고, 가만히 웃고만 계셨다.
사람들 발만 보고 있어도 현기증이 올라왔다. 대전역 1번 출구는 사람들로 붐볐다.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옮겨가고 있어서 그런지 반소매를 입고 있는 사람부터 가벼운 카디건을 입은 사람까지 통일감이라곤 없어서 더욱 북적임이 심했다.
현영은 1번 출구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가 생각보다 늦어지자 초조한 마음에 한쪽다리를 살짝 떨고 있었다. 애꿎은 휴대전화 버튼만 켰다 껐다를 반복했다. 그런데 멀리서 할아버지 한분이 같은자리에서 두리번거리며 무엇인가를 찾는 것 같았다. 도와드릴까? 괜히 끼어드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순간에도 할아버지는 계속 1번 출구 주변만 두리번거렸다. 할아버지 옆에는 8살쯤으로 보이는 꼬마아이도 보였다. 옆에서 할아버지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사람들의 빠른 발걸음에 도무지 신경을 집중할 수 없는 듯 보였다.
안되겠다 싶어 할아버지께로 다가갔다.
“저기. 할아버지. 어디 찾으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 고맙네. 한밭교육박물관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되는지 모르겠네. 몇 번 가본 적이 있는데 오늘따라 길을 자꾸 헤매네, 허허”
할아버지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옆에 꼬마 아이는 할아버지 옆에 꼭 붙어서 눈만 깜박일 뿐이었다.
“아, 한밭교육박물관이요? 여기에서 가까워요. 이 근처에요. 여기에서 가셔도 되고, 3번 출구로 나가시면 더 가깝고요.”
“아 그런가? 고맙네, 고마워.”
할아버지는 서양영화에서나 등장하는 중후한 노년의 신사 모습이었다. 어쩐지 박물관과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꼬마아이는 할아버지의 손주였을 것이고 주말을 이용해서 아이와 박물관 나들이를 하시려는 듯했다.
한밭이라. 대전에 쭉 살면서도 한밭이라는 단어는 언제 들어도 참 생소했다. 최근에는 한밭대학교나 한밭수목원, 한밭야구장까지 대전이라는 지명을 한밭이라는 옛 지명으로 바뀌어가고 있음에도 약간의 시대적 이질감이랄까? 그런데 아까 만난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한밭이라는 단어는 참 정감 있었다. 할아버지와 잘 어울린달까?
현영이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친구가 도착했다. 늦어서 미안하다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친구는 오늘 약속시간에 늦은 대가로 오늘 현영이 하자는 것에 군말 없이 따른다고 했다. 현영은 잠시 고민하더니 친구에게 뜻밖의 장소에 가자고 했다.
한밭교육박물관이었다. 지금 그곳에 간다면 아까 마주친 할아버지와 꼬마아이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박물관? 무슨 황금 같은 주말에 박물관이야~ 우리가 무슨 열혈 초등생이니?”
“방금 전에 내가 하자고 하는 거 군말 없이 따른다며! 그리고 원래 배움에는 끝이 없는 거야!”
친구의 팔을 잡아당기다시피 하여 도착한 한밭교육박물관.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많았지만 역 근처처럼 복잡한 느낌은 아니었다. 정돈된 느낌이 가지런해 보이기까지 했다. 한밭이라는 느낌과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꼬마가 있는 그림이 썩 잘 어울리는 곳이기도 했다.
많은 꼬마손님들이 갖가지 민속체험을 하며 하하 호호 웃음소리를 냈다. 전시공간에는 교과서에서만 보던 책들이 있었다. 현영은 전시를 구경하며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까 만난 할아버지와 꼬마아이를 찾는 중이었다.
‘벌써 가셨나? 아쉽네.’
현영이 관람을 마친 뒤 뒤돌아 나가려는데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할아버지와 꼬마아이 모습이 보였다.
현영은 빙그레 웃었고 마음 한켠이 따뜻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