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상사화가 왜 상사화인줄 알아?”
“글쎄”
“에이, 그것도 몰라? 상사화는 말이야. 잎이 져야 꽃이 피고, 꽃이 져야 잎이 나는 꽃이야. 세상에, 꽃하고 잎이 만나지를 못해. 그래서 서로를 평생 그리워만 한다나? 이 얼마나 궁상맞은 꽃이냐. 내 인생하고 아주 똑같아…….”
“또 내 얘긴 듣지도 않고 하고 싶은 말만 하지. 아, 엄마! 방에 들어가서 자! 아유, 술 냄새!”
연례행사다. 상사화가 만개할 때마다 엄마에게 끌려 영광에 오기를 벌써 사 년째. 엄마는 항상 저녁 무렵에 영광에 도착해서 술을 진탕 마시고는 다음날 몽롱한 상태로 불갑사에 갔다. 그리고 잎도 없이 새빨간 상사화 속에 파묻혀 기도를 했다. 혹시 엄마가 독실한 불교 신자라서 상사화가 만개한 것을 부처님 공으로 돌리는 거 아니냐고? 아니, 우리 엄마는 나만 믿는다. 신보다도 내가 더 낫단다. 하긴, 엄마는 살아생전 아빠도 믿지 않았다.
아빠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우리에게 믿음을 준 적이 없었다. 잠수 타다 빚만 안고 돌아오기를 수십 번. 그래도 엄마는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아빠의 빚을 갚았고, 마지막으로 빚 대신 병을 안고 돌아온 아빠를 임종직전까지 극진히 간호했다. 나는 평생 애정 없는 남자를 뒤치다꺼리하며 살아온 엄마가 가여워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가 흠모했던 다른 남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반갑기까지 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엄마에게도 엄마의 인생이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엄마, 남자친구 만들어도 돼. 이제 아빠도 없으니까 자유잖아. 결혼 직전까지 좋아하던 딴 남자 있다며? 나 신경 쓰여서 머뭇거리는 거야?”
“아냐. 그런 거. 그 사람 출가했으니까.”
엄마가 좋아하던 사람은 어느 절의 스님이 되었다고 했다. 출가 전날, 훌쩍이던 엄마에게 잎이 없는 상사화 한 송이를 주며 이승에서 흠모했던 걸로 만족하니 저승에서 보자고 했다나? 하여간 아빠가 돌아가신 다음해부터 엄마는 해마다 상사화를 보러 나섰다. 그 스님의 소식은 알 수 없으니, 스님 대신 상사화가 있는 절이라도 가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검색 끝에 영암의 ‘불갑사’가 상사화 최대 군락지라는 사실을 알아냈고, 엄마는 더 묻지도 않고 영암가는 차표를 샀다. 그리고 매년 9월, 나는 내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 없이 상사화 축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해마다 엄마의 간접 연애를 훔쳐보는 기분으로 말이지.
다음 날, 눈을 떠 보니 엄마가 먼저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아직 술 냄새도 가시지 않았는데, 의욕 충만한 모습이었다. 이국적인 모양의 불교 테마 공원을 지나 붉은 다리를 지나니, 붉은 꽃이 바다처럼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이뤄지지 못하는 인연에 반발하듯 붉게 타오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잎도 없이 홀로 화려하게 피어난 것을 보니 고고한 한편 처연하게 보이기도 했다.
엄마는 상사화가 살아있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귀하게 쓰다듬고, 곱게 보듬었다. 그리고는 화소 낮은 폴더 폰을 꺼내어 요리조리 다른 각도에서 사진을 쉼 없이 찍었다. 나는 예년처럼 그런 엄마에게서 조금 멀찍이 떨어져 꽁무니를 쫓아다닐 뿐이었다.
“소녀 같으시네요.”
정신없이 사진을 찍으시는 엄마에게 웬 사내가 말을 걸었다. 민머리에 승복을 입을 걸 보니 스님인 듯 했다. 엄마는 얼굴이 붉어졌다.
“예, 예? 환갑이 다 되어 가는데 소녀라니요…….”
“상사화 이야기에 나오는 소녀 같으세요. 스님에게 반해 속앓이 하다가 죽어 무덤에 상사화를 피웠다는 그 아가씨 말이에요.”
스님의 이야기에 엄마와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야말로 엄마의 이야기가 아닌가. 입을 쩍 벌린 엄마를 보며 스님이 말을 이었다.
“어떤 스님이 상사화 소녀가 오면 전해 달라 하셨어요. 그동안 고되게 사느라 고생 많았고, 남은 인생 자유롭게 살라고요. 그리고 앞으로도 상사화 철엔 꼭 불갑사를 찾아 달라 하셨습니다.”
엄마는 두 눈이 그렁그렁해진 채로 서 있었다. 나는 엄마의 뒷모습에서 처음으로 작은 소녀를 보았다. 붉게 일렁이는 상사화 사이에서 어느새 엄마도 꽃처럼 흐느끼며 일렁이고 있었다.
“이왕에 놀러가는 거 좀 멀리 갈 것이지, 이게 뭐야?”
열 살짜리 동생은 신이 났지만, 올해 중학생이 된 지훈이는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방학을 맞아 처음으로 나선 가족 나들이인 만큼 해수욕장 같은 떠들썩한 곳으로 갈 것을 예상했는데, 아버지가 서울에서 한 시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여주의 신륵사로 템플 스테이를 하러 가자고 하셨기 때문이다. 어제 저녁부터 결사반대를 외쳤지만, 어머니와 동생이 아버지 편을 드는 바람에 지훈이가 다수결에서 밀리고 말았다.
“우와, 형! 저것 좀 봐!”
시무룩한 얼굴로 휴대전화만 내려다보고 있던 지훈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찻길 옆으로 돌연 바다가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마음에 드냐? 네가 계속 토라져 있어서 잠깐 들렀다. 꿩 대신 닭이라고 저수지라도 좀 봐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다가 아니라 바다처럼 커다란 저수지였다. 지훈이는 아버지가 고갯짓으로 가리키신 곳을 보고 저수지 구경을 하다 말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저게 한 이백 미터 정도 되는 미끄럼틀이야. 아마 우리나라에서 제일 길다고 하지? 한 번 타 보고 갈래?”
“네!”
“다 큰 척 하더니 아직 애는 애구나.”
어머니가 웃음을 터뜨리셨다. 자세히 보니 저수지만 휑하니 있는 게 아니라, 광장도 있고 체육 시설도 꾸며져 있었다. 지훈이도 동생도 미끄럼틀에 잔뜩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지훈이네 가족은 잠시 저수지변에 차를 대고 쉬다 가기로 했다. 지훈이는 동생과 함께 몇 번이나 미끄럼틀을 탔다.
“아, 이렇게 재밌는 것만 많으면 좋을 텐데.”
다시 길을 떠나게 되자 지훈이가 아쉬운 목소리로 투덜댔다.
“녀석, 가보기도 전에 그러면 안 되지. 거기 가면 염주도 만들 수 있고, 연꽃도 만들 수 있어. 어디 보자. 이 근처에 세종대왕릉도 있고 주록리도 있지. 오늘 하루 절에서 자고, 내일은 요 근처를 좀 돌아다녀볼까?”
“주록리? 그건 그냥 마을 아니야?”
“그냥 마을이라니. 사슴 마을이야.”
사슴 농장이 있는 마을인가 했더니 그건 또 아니었다. 주록리는 달릴 주 자에 사슴 록 자를 쓰는데, 사슴이 달릴 정도로 깨끗하고 맑은 곳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마을이 생기며 사슴은 전설 속으로 사라져버렸지만, 주록리는 여전히 가재가 잡힌다고 한다.
“가재뿐이냐? 반딧불도 볼 수 있다, 반딧불도. 게다가 여기 이 금사저수지는 팔뚝만한 잉어가 잡혀서 낚시꾼들이 아주 좋아하는 곳이야. 박물관도 있고 이 근처가 볼거리가 아주 많아서, 나라에서 아예 나들이길 코스를 짜 놨을 정도라니까?”
결혼하시기 전까지 여주에 사셨다는 아버지는 명성황후 생가며 금싸라기 참외, 목아 박물관 등등 여주의 자랑거리들을 잔뜩 늘어놓으셨지만, 지훈이의 머릿속에는 계속 사슴이 맴돌았다. 사슴은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인 줄 알았는데 마을 이름이 될 정도로 사슴이 많이 살던 곳이 근처에 있다니!
“아빠, 그 주록리에 살았다는 사슴 말이야. 아직도 있을까?”
아버지는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사슴이 전설 속으로 사라진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 사람들을 피해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간 거라 아직 사슴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셨다.
“확실한 건 나도 잘 모르지만 말이야.”
신륵사에 도착해서도 지훈이는 뒷산을 계속 힐끔거렸다. 남한강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풍경도 멋졌지만, 산 너머로 사슴 한 마리가 갑자기 고개를 내밀 것만 같았다. 아까 아버지가 하신 말이 떠올랐다.
“혹시 모르지, 신륵사 뒷산으로 가서 살고 있을지.”
할머니 손에서는 매운 내가 난다. 할머니 댁에 가서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면 할머니는 아이고 예쁘다 내 새끼 하면서 내 볼을 쓰다듬는다. 그때마다 매운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기 때문에 안다.
엄마, 일 좀 그만하시라니까. 엄마 고집도 참. 근데 저번에 담근 고추장은 잘 됐나? 하며 은근슬쩍 장독대로 향한다. 그럼 할머니는 말없이 빛깔 좋은 고추장을 아낌없이 담아주신다. 말은 일 좀 그만하라고 하면서 매번 고춧가루와 고추장을 가질러오는 엄마는 할머니가 정말 일을 그만두시길 바라는 것일까.
할머니는 늘 손끝이 아리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마당에 널려있는 고추들을 만질 때면 더욱 그러셨다. 고추를 만지면 손끝이 아리구나. 아린 다는 뜻이 무언지는 몰랐지만 만지지 않았다. 엄마는 마트에서 파는 고추장은 쳐다도 안 봤다. 내가 우연히 마트에서 할머니네 동네에서 나오는 고추장이라고 말했을 때에도 엄마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우리 동네 유명한 고추장 장인이셨다. 도심에서 수도 없이 맛의 비결을 물었지만 할머니는 고추장을 만들 때만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어느 날인가 할머니가 엄마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병원에 가 봐야 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갔고 그때까지도 할머니에게 또 잔소리를 했다.
“거봐, 그러니까 내가 일 좀 그만하시라니까. 이게 다 일을 너무 많이 해서 그래.”
…
“노인성 치매이신 것 같습니다. 정밀한 검사를 받아봐야 알겠지만…”
의사는 전문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엄마와 할머니는 이미 충격에 의사가 말하는 뒷말이 그저 소음으로만 느껴져 미간을 찌푸렸다.
“그…. 그러니까. 치매라고요? 저희 엄마가요? 얼마나 진행된 상태인가요?”
“아, 의사 소견상 치매인 것 같으나 아직 정밀한 검사를 …”
할머니는 소신 있게 자신의 소견을 이야기하는 여의사의 말을 더 듣지 않고 일어났다.
항상 정갈하고 깐깐하게 한 길만을 고집하였던 할머니였기에 의사의 입에서 나온 치매 진단을 받아들일 수 없는 우리였다. 아니 할머니 자신이었다. 어쩐지 그런 할머니에게선 고추의 매운 냄새가 아닌 미묘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치매로 인해 가꾸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할머니조차 가장 아끼는 고추장처럼 발효되어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할머니는 고추장 다음으로 장독대를 제일 아끼셨다. 그곳에서 고추장의 맛이 깊어진다고 하셨으니까. 할머니 댁에 가면 마당에 담장을 끝으로 수십 개의 장독이 늘어서 있다. 언젠가 할머니께 이 장독대에 다 고추장이 들어있느냐며 팔짝 뛰며 신기해한 적이 있다.
할머니는 의사에게 진단을 받으시고는 장독을 하나씩 깨뜨리기 시작하셨다. 지나온 세월에 대한 분풀이였을 것이다.
엄마는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할머니는 울지 않으셨다. 그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괜찮아 보일까 싶어서였을까.
장독을 세 개쯤 깨뜨리시던 할머니는 그만 자리에 주저앉으셨다. 그리고는 깨뜨린 장독에서 흘러나온 고추장을 맨손으로 매만지셨다.
“손끝이 아리구나.”
할머니의 기억은 점점 감퇴되었다. 하지만 할머니 손에서는 여전히 매운 내가 났다.
할머니는 점점 기력이 쇠해지면서 말수도 적어지셨다. 동네 경로당이라도 다시시면 좋으련만 며칠 나가시더니 그마저도 발길을 끊으셨다. 말이 경로당이었지 할머니보다 연배가 훨씬 적은 젊은 할머니들의 등쌀에 외부인 취급을 받으신 할머니는 그날로 줄곧 집안에만 계신다.
할머니는 건넌방도 거실도 아닌 베란다에 보금자리를 만드셨다. 구부정한 허리에 다리를 곧게 뻗으시고는 베란다 발코니에서 창밖을 내다볼 뿐이었다. 식사를 하거나 화장실에 용무를 보러 가시는 시간 이외에는 대부분 베란다에 계셨다. 베란다와 할머니는 위태로워 보였다. 그런 점에서 할머니에게 제법 어울리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엄마는 할머니에게 화초라도 가꿔보는 것은 어떠냐고 했지만 금방 죽어버릴 걸 뭐 하러 사오냐며 그만 두라고 했다.
할머니는 줄곧 시골에서 사셨다. 꽃다운 나이에 시집온 그 동네에서 알콩달콩 살림을 꾸리며 십수 년의 세월을 보내셨다. 할머니 댁 앞마당에는 작은 개울가와 원두막이 있어 여름이면 꼭 할머니 댁에서 하루를 보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작은 개울가에서 발도 담그고 빨래도 하던 공간을 70여 년 만에 떠나 서울로 올라오신 거다. 얼마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가 우리 집으로 할머니를 모셔왔다. 할머니는 한사코 거절하였지만 혼자 시골에서 적적하실 뿐더러 몸도 편치 않으셔서 안 된다며 엄마의 고집이 할머니 고집을 꺾었다. 서울로 올라오신 할머니는 서울도 참 많이 변했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점점 더 위태로워지셨다. 엄마는 그런 할머니에게 산책이라도 다녀오시라고 했지만 말뿐이었다. 엄마도 할머니에게 최선을 다하고는 있었지만 그 무엇도 할머니의 무언가를 채워주지는 못했다. 베란다에 있는 시간도 더 길어지셨다.
“베란다에 도대체 뭐가 있길래 하루 종일 거기만 쳐다보고 있느냐고. 누가 보면 억지로 데려가 가둬두는 줄 알겠어. 우리 집 신고 당하면 다 엄마 때문인 줄 알아.”
“그냥 답답해서 그런 거니 신경 쓰지 말라 안하나.”
“답답하면 산책을 나가던가. 왜 집밖을 안 나가는데 같이 쇼핑가자고 해도 싫다고 하고 외식을 하러 나가자고해도 싫다 그러고. 노인네가 고집은 또 왜 이렇게 센지.”
엄마는 속상한 마음을 풀어놓았다. 그럴수록 할머니는 더욱 베란다 가까이에 붙었다. 나는 할머니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
할머니를 모시고 청계천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변해버린 서울이 두려워 집 밖을 나가기가 무서우셨던 거다. 늙어버린 당신과 함께한 고향을 두고 모든 것이 낯선 동네에서의 두려움은 할머니를 베란다로 내 몰았던 것이다. 그렇게 보금자리에서 위태로운 삶을 버텨가던 할머니는 결국 시골집의 작은 개울이 그리우신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병원 검진 때문에 집밖을 나오셔야 하는 날, 나는 진료를 받고 할머니를 청계천으로 모시고 갔다. 아이들은 발을 담그고 하하 호호 웃으며 놀고 있었고 청계천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할머니는 한참 동안 청계천을 바라보셨다.
막혀있던 물줄기가 시원하게 뻗어나가듯 청계천을 흐르는 물줄기가 제법 거셌다. 잘 꾸며놓은 조형물에 가까운 곳이었지만 할머니는 서울 한 가운데에서 시골 앞 개울가를 만난 듯 하셨다. 반가움에 두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할머니, 다리 안 아프셔요? 이제 그만 갈까?”“조금만 더 있다 가자꾸나. 조금만.”
“서울도 많이 바뀌었지요? 옛날에는 여기가 다 시멘트 바닥이었는데. 몰라보게 바뀌었어. 이렇게 꾸며놓으니 좋지요?”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시골 개울가처럼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거나 멱을 감지는 않았지만 할머니 눈에는 검게 그을린 개구쟁이 아이들이 수업이 끝나고 미꾸라지를 잡는 모습으로 보이는 듯했다. 청계천 8경 중에서도 할머니는 5경에서 가장 오래 머물러 계셨다. 5경은 빨래터를 재연한 공간으로 아마 할머니의 집 앞 개울을 가장 많이 닮은 곳이기도 했다. 할머니의 눈시울이 조금은 붉어졌다. 그리고 마른 입술을 매만지셨다.
청계천에 다녀오신 후로 할머니는 기력을 조금씩 되찾으셨다. 베란다에 나가 계시는 시간도 줄고 간간히 산책도 다녀오셨다.
할머니의 시간은 앞으로도 흐를 것이고 청계천의 물도 이제는 마르지 않고 흐를 것이다. 언제나 언제나.
자영업을 하기 때문에 평소 쉽게 가게 문을 닫을 수 없었던 남자. 그래서 주기적으로 떠나는 휴가도 한번 제대로 떠나본 일이 없다. 그렇게 쉼 없이 달려온 3년이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사업이었기 때문에 남자는 지난 3년간 아내와 아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이게 다 처자식을 위해 뼈 빠지게 버는 돈이라고 생각해왔으니까 미안하긴 했어도 조금은 당당했다. 그런 남편을 아내도 적잖이 이해해주는 눈치였다.
생전 가게로 전화를 안 하는 아내인데 웬일인지 가게로 다 전화를 했다. 아내의 말이 빨랐고 약간은 울먹였다.
“전화가 왔었어요. 방금. 민준이 담임선생님한테.”
“담임선생님한테? 왜? 민준이 뭐 사고친거야?”
“아, 아니. 학교에서 청소년 우울증 상담검사 같은 걸 받았는데. 결과가….”
평소 전화는커녕 부모님 모시고 오라는 소리 한번 듣지 않았던 터라 심장이 덜컹했다. 차라리 친구와 싸우거나 숙제를 안 해왔다는 전화였으면 좋았을 걸. 담임선생님의 전화는 뜻밖에도 아이가 학교에서 받은 청소년 우울증에서 우울증 수치가 높게 나왔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좀 더 자세한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전화였다.
우울증. 학교 다니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들었나? 아니면 학교에서 친구들과 관계가 좋지 않나? 그런 것도 아니다. 아내의 말대로라면 담임선생님께선 아이들과의 문제는 없어 보인다고 했으니까.
누구를 위한 3년의 시간이었나 생각한다. 남자는 가장으로서 나름대로 열심히 하였는데 아이는 아빠의 빈자리를 조금씩 넓혀가고 있었나보다.
모처럼 가게 문을 닫고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월성계곡으로 떠났다. 병원을 가보기 전 일단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담임선생님의 소견이었다. 아이는 즐거워보였다. 담임선생님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아니 아내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아이에게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감정 상태는 어떤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방송을 타서인지 계곡에는 때 늦은 피서객이 몰려들었다. 아빠와 즐겁게 물놀이를 하는 아이도 보였고 튜브를 타고 물살을 즐기는 아이들도 보였다. 멀리서 고기 굽는 냄새와 옥수수를 먹는 아이들이 보이며 한가롭기 그지없었다. 내 아이의 머릿속도 아니 마음속도 한가롭다고 느껴지면 좋을 텐데 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물은 시리도록 맑았고 푸른빛이 맴도는 풍경은 봄의 화사함만큼이나 밝았다. 저마다 하하 호호 웃는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방갈로 마다 퍼져나갔다.
하루를 아이와 꼬박 즐겁게 놀아본 것이 얼마만인지 남자의 머릿속은 금세 까마득해졌다. 내심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는 해맑게 방갈로를 뛰어다녔고 여느 때와 같이 즐거워보였다. 은근슬쩍 학교에서의 생활을 물어보기 좋은 시간이었다.
“학교 다니는 것이 힘들어? 친구들과 사이는 어때? 공부하는 것이 지치니?”
“아빠, 그렇게 한꺼번에 많이 물어보면 어떻게 해요.”
“그래도 빨리 대답해봐. 응?”
“음. 아빠! 우리 다음에는 또 어디가요?”
남자의 걸음에 여자는 자꾸만 뒤쳐진다. 벌써 몇 번이나 천천히 걷자고 했으나 남자의 걸음은 자꾸만 빨라진다. 여자는 헤어짐이 아쉬워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느리게 걷고 있는데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꾸만 재촉이다. 하지만 남자의 속마음은 헤어짐이 아쉬워 좀 더 많은 곳에서 여자와의 추억을 남기고 싶은 것이었다. 이렇게 서로의 속마음이 어긋난 채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얼마나 남았지?”
여자는 남자에게 시간을 물어보았고 남자는 자동적으로 자신의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지만 언제인지 남자의 시계가 멈춰있었다.
“시계 약이 다 달았나보다. 이 근처 시계가 있을 텐데.”
남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멀리서 은은한 노랫소리가 울렸다. 여자와 남자의 시선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했다.
“여기 이런 것이 생겼어? 못 보던 새에 여기도 많이 변했네.”
“그러게. 다른 나라에 와 있는 것 같아.”
남자와 여자는 어느새 아찔한 높이의 시계탑 앞에 도착해있었다. 때마침 카리용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선율이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여자의 긴 생머리가 바람에 따라 살며시 흔들렸고 여자의 머리카락이 흔들릴 때마다 좋은 향기가 났다. 남자는 문득 이 향기가 그리울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계의 분침이 12를 가리킬 때 남자는 떠나야했다. 둘은 헤어짐을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이미 수차례 생각하고 고민해서 내린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잠시 동안만 떨어져 지내는 것일 뿐 영영 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여자는 몸이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것이 아니겠냐고 답했다. 누구의 의견이 맞는지는 여자도 남자도 몰랐다.
“2년이야. 군대 갔다 생각하고 봐주면 안돼?”
“2년 후면 나 서른다섯이야. 군대 간 남친 기다리는 거 20대도 아니고 못해 난,”
“나 곧 가. 정말 이대로 헤어질 거야? 우리 아직 사랑하잖아.”
“그래. 아직 사랑한다면서 왜 가려는 거야? 그만하자 벌써 이 얘기만 며 칠 째야. 가. 잘 가고 행복했으면 좋겠어. 시간 없잖아.”
여자가 돌아서려는데 카리용의 노래가 절묘하게 멈췄다. 뒤돌아서려는 여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여자는 남자를 쿨하게 보내주기로 하였기에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그 때 남자가 여자의 팔목을 잡았다.
여자는 팔에 힘을 뺐고 남자는 그대로 돌아섰다.
그렇게 계절이 두 번 바뀌고 각자의 삶속에서 치열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남자는 기계에 몰두하여 밤낮없이 일을 했고 가끔씩 여자를 떠올렸다. 여자를 떠올리는 이유가 단순히 고향을 떠나온 외로움일 것이라 여겼다. 이 또한 지나가겠지라며.
여자도 나름대로의 생활에 바빴다. 주변에서는 얼른 다른 남자를 만나보라고 재촉도 하고 권유도 했지만 여자는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남자를 무작정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직 준비가 안 된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남자가 파리의 시계탑 앞에 서있다. 시간은 12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고 여자도 우연히 혜천타워 앞에 서있다. 시계를 보고 있었다. 그날 남자가 손을 잡았을 때를 떠올렸다. 남자가 그리웠으나 별 도리가 없었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그 앞에 서있었다. 그때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남자의 손에는 인천행 비행기티켓이 들려있었다.
오늘로 단종께서 유배령을 받은 지 꼬박 닷새만이다. 한참을 걷고 또 걸어 겨우 주천에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단종께서는 심신이 매우 지친상태로 보여 걱정이 됐다. 겨우 12살인 단종. 역사는 어린나이에 숙부에게 왕의 자리를 내어주고 유배령을 받은 비운의 왕으로 기억할 것이다.
단종께서는 많이 지치셨는지 입이 바싹 말라있었다. 마을을 둘러보기도 전에 물 한 모금을 청할 곳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마을에 있는 조그마한 우물가를 발견하고 단종은 물 한 모금을 겨우 마시며 지친 몸을 풀어야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유배 행렬은 다시 이어졌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고 험준한 산을 올라야 했다. 행렬을 뒤따르는 우리는 물론 단종께서도 매우 지쳐있는 상태였으나 단종께서는 고갯마루에 다다르자 자신을 위해 죽어간 사육신을 떠올리며 궁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세상에 어떤 왕이 자신을 위해 죽어간 이들을 생각하며 흙바닥에 큰절을 올릴 수 있을까. 단종은 그저 고마운 마음을 전하려는 것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며 쓴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우리는 마침내 낡은 나룻배를 타고 외딴 섬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청령포라고 불리는 고즈넉한 곳이었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 우리에게는 수라를 올릴 궁녀도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울창한 소나무 숲뿐. 단종께서는 소나무로 우거진 섬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는 자신보다 정순왕후의 걱정을 먼저 하였다.
우리는 급하게 밭에서 옥수수와 메밀로 수라상을 올렸고 우리가 청령포에 도착한지 5일이 지난 후에야 궁녀4명이 도착하였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더 지나도 단종께서는 제대로 먹지도 잠들지도 못하였다. 한양에 남겨둔 정순왕후 때문이리라. 단종께서는 종종 뒷동산에 올라 정순왕후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며 탑을 세우곤 하였다.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지 못한 설움과 미안함으로 단종은 자주 눈물을 보였다.
그런데 이곳의 생활도 그렇게 길지는 못하였다. 홍수가 나 거처를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풍헌으로 유배지를 옮기자마자 한양으로부터 사약을 받으라는 명이 들려왔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한없이 많은 슬픔을 간직한 왕, 나의 왕이 죽음을 맞았다.
차마 슬픔으로 가득한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단종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하고 동강에 버려졌다. 단종의 시신을 거두고자 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포가 내려졌기 때문이다. 왕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신하로서의 예도 다하지 못하다니.
쉽사리 누구 하나 나서는 이 없던 그때 영월의 호장이었던 엄흥도가 소식을 전해왔다. 단종의 시신을 자신이 거두겠다는 것이다. 그의 단호한 전갈에 마음이 저려왔다. 진작 마음의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기 때문이리라.
급히 동강에 버려졌던 왕의 시신을 거두었다. 그리고 한동안은 쉽사리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엄흥도도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단종의 시신을 거둔 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전갈이 도착했다. 엄흥도가 생을 마감하였다는 내용이었다. 또 한 번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엄흥도는 그는 무심하게 솟아오르는 소나무가 되었으리라. 그리고 여전히 나의 왕 그리고 우리의 왕을 영원히 지키리라.
중학교 3학년 국어 시간, 같은 반 아이들은 우리가 사는 동네가 교과서에 나온다며 즐거워했지만 나는 그 틈바구니에서 내가 원미동에 살게 된 것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마치 소설 <원미동 사람들>의 한 사람처럼 나는 눈앞에 닥쳐온 걱정들을 빠르고 무딘 방법으로 해결하길 원했으며 별다른 불만사항은 물론이고 별다른 꿈도 없었다.
넉넉지 못한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난 탓일까,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가 본 곳이라고는 국립공원이나 친척 집뿐이었다. 또래들과 같은 시기에 컴퓨터를 사지도 못했고, 유원지나 해외여행 같은 곳에 가자고 졸라본 적도 없었다. 내 또래의 아이들이 디지털 시대를 달릴 때 나는 홀로 아날로그 시대를 걸었다. 남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틀 만에 집에 들어오신 아버지에게 방학숙제를 위해 박물관에 가야 한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웃으며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주셨고, 나는 묵묵히 오천 원짜리를 받아들고 집을 나섰다. 내가 원미동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은 부천 만화창작 스튜디오에 입주하신 아버지 때문이었다. 좀처럼 돈을 벌기 힘들다는 직업을 택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자간의 대화가 갈수록 줄고 있는 것 또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원미 1동의 연립주택 203호에서 가장 가까운 박물관은 지하철로 네 정거장 거리에 있는 부천 만화박물관.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아주 현실적인 범주 안에서의 판단이었다. 대강 훑어보고 견학문을 쓸 요량으로 빠르게 걸었다. 영화관에 가기보다는 만화방에 틀어박혀 있는 경우가 훨씬 많은 나였지만, 아이들처럼 뽀로로를 외치며 뛰어다닐 수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멈추어 선 곳은 볼록거울 앞이었다. 돌연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진 내 모습이 사방에 펼쳐진 것에 놀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기저기 뒤틀리고 구부러진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바라보며 온갖 생각을 다 해 보았다.
왜 가난한 집에 태어났을까. 기껏 외출할 기회가 생겼는데, 왜 고작 집 근처에 위치한 박물관에 와야 하는 것일까. 내 어깨는 왜 항상 움츠러들어 있을까. 그리고 왜 하필 여기에 이상한 거울을 설치해서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건지에 대한 의문에 코너의 이름을 보니 ‘만화가의 머릿속’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한 마디가 불쑥 튀어나왔다.
“뭐야.”
웃음이 터진 나는 만화가의 머릿속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찬찬히 살펴보았다. 엉뚱한 상상력과 꿈이 넘치는 일상. 그곳은 아버지의 머릿속이었다. 행복과 불행은 종이 한 장의 차이라 하였듯이, 우스꽝스러움과 독특함 또한 종이 한 장의 차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폐관시간까지 박물관을 떠나지 못했다. 만화가들은 여전히 가난해 보였고, 하나같이 행복해 보였다.
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내 몫의 저녁상을 차려놓은 채로 잠들어계셨다. 분명 어젯밤에도, 어쩌면 그제 밤에도 밤샘을 하셨을 것이다. 나는 장롱에서 이불을 꺼내어 아버지에게 덮어드리고는 다 식은 국을 맛있게 떠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한국 만화 영상 진흥원 안에 위치한 비즈니스 센터로 일터를 옮기셨다. 입주 경쟁이 꽤 치열한 곳이라고 했는데, 용케 심사를 통과하셨다. 한국 만화 영상 진흥원과 부천 만화박물관이 부천 영상 문화 단지 안에 나란히 입주해 있었다. 사무실 이전을 도우며, 나는 아버지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아빠, 나 있잖아. 나도 그림을 그려볼까 해.”
아버지는 대답 대신 웃으셨다.
그날 저녁, 나는 원미동 연립주택의 거실에 누워 <원미동 사람들>을 읽었다. 교과서에 실린 김포 슈퍼와 형제 슈퍼 얘기가 전부인 줄 알았더니 꽤 두꺼운 연작소설이었다. 첫 장을 넘기자 첫 단편의 소제목이 보였다. ‘멀고도 아름다운 동네’. 그곳은 내가 사는 동네였으며, 아버지가 사는 동네였다. 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에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