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던 내게, 할머니들은 내 부모님이 용을 타고 멀리 떠나셨다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주 훌륭하신 분이었다 한다. 강직하고 정의감 넘치는 성격의 아버지와 온화하고 정이 많은 어머니. 모두들 자신의 부모를 더러 이렇게 묘사하곤 하지만, 내 경우는 조금 특별하다. 그러니까 그게 얼마만큼의 훌륭함이냐고 하면, 이십 여 년 전의 교통사고에서 두 분의 몸으로 나를 끌어안아 내 목숨만을 구하고 돌아가셨을 정도. 딱 그 정도의 훌륭함이다.
부모님께 ‘감사’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다. 아마 부모님의 훌륭함이 내 성격에까지 번져 오기까지는, 꽤 오랜 세월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적어도 6년 보다는 많은 시간 말이다. 부모님과 함께 한 시간이 짧아서인지 나는 좀처럼 부모님의 얼굴이나 성함을 기억해내지 못했고, 대신 고아로 지내 온 시간 동안 견뎌야 했던 숱한 아픔들을 기억했다. 부끄럽게도, 나는 내 생의 대부분을 부모님을 원망하는 데에 쏟았다.
“야가 또 뭘 하고 있노, 퍼뜩 좀 온나.”
“아이구, 사돈. 좀 천천히 가요. 노인네가 무슨 걸음이 그리 재답니까?”
나는 두 할머니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나란히 굽은 할머니들의 등이 보였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나는 이 두 분의 손에 자랐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자식을 한 날 한 시에 잃은 두 분은 이십 여 년을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 오셨다. 자식을 잃은 아픔도, 엇나가는 손자에 대한 아픔도 함께 나누어 오셨던 것이다.
“천천히 가요, 차 시간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어요.”
내 말에 뒤를 돌아본 할머니들이 곧바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시다 다시 고개를 돌리셨다. 오늘은, 할머니들의 품을 떠나 서울로 향하는 날이다.
이십 여 년. 누구도 짧다고는 말하지 못할 그 세월 동안 두 분의 할머니는 매주 이 산길을 오르셨다. 슬픔을 이기기 위해,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내 이름의 끄트머리와 같은 글자를 쓰는 절을 찾아 시작한 산행은 이제 두 분의 낙이 되었다. 그 이십 여 년 동안 한 번도 할머니들을 따라 이 길을 오른 적이 없다니, 나도 좋은 손자는 아니라는 생각에 새삼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산 중턱의 너른 터를 너머로 지붕을 환히 펼친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둥그런 산의 능선들과 어우러진 사찰의 모습이, 마치 작은 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서 울리는 풍경 소리가 귓가에까지 와 닿았다. 화려함도 떠들썩함도 없는 절을 왜 그렇게들 찾아가나 했더니, 이 따뜻하고 향기로운 분위기 때문이었나 보다. 두 할머니는 석탑 앞에서, 또 불상 앞에서 끊임없이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셨다.
“뭘 그렇게 비시는 거예요?”
“뭐긴, 이놈아. 다 너 잘 되라고 비는 거지. 이십 년 동안 빌었으니 이제 곧 지문이 닳겠어.”
나는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웃었다.
“봐라, 여기 우리가 서 있는 데가 용이 웅크린 자리다. 옛날에 이 산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올랐다고 하는데, 원래는 열 마리가 있었다고 하데. 혹시 아나. 니가 그 마지막 용을 타고 하늘에 오르게 될지 말이여.”
“그렇게 오래 마음고생을 하며 웅크려 있었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서러웠겠노. 우리가 그 마음을 다 용한테 맡겨 놨다. 이제 훨훨 나는 일만 남은 것이여.”
나는 아리송하고도 복잡한 마음으로 할머니들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할머니들은 내게, 부모님이 용을 타고 떠나셨다고 했다. 저 멀리 구름 너머로, 춤추듯 너울거리는 용의 등허리를 타고 가셨다 했다. 이제 내게 용을 타고 떠나라 하시는 것을 보니, 할머니들은 아직 그녀들의 자식을 보내지 않으신 것이 분명했다.
“용진이 니도 용 허리 한번 타그라. 근심걱정 다아 용한테 맡기고, 니는 그냥 훨훨 날아가그라.”
그 때, 할머니들의 미소 아래로 오래 된 이야기 속의 용들을 보았다. 쉬이 보지 못할 곳, 너무 멀어 쉽게 닿지 못할 곳에서 할머니들의 소중한 보물을 끌어안은 용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 해 버렸다. 곱창골목에 가고 싶다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더니만, 일부러 먼 곳에서 오는 내게 시간을 맞춰 주는 정도의 융통성도 없는 건 여전하다. 칼같이 시간을 지키는 그 섬세함은 나 때문에 생긴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약속 시간 한 시간 반 전으로 알람 맞추고, 정시에 도착해! 약속 시간 십 분 전에는 전화 하고. 일 분도 지각하면 안 돼!’라고 으름장을 놓았던 것은 항상 내 쪽이었다.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곱창골목에서 걸어서 십 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카페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예나 지금이나, 이 거리는 참 예뻤다. 마치 향기로 골조를 세운 것처럼, 각 가게의 특색이 그대로 반영된 건물들이 가득 들어 차 있다. 프랜차이즈 점들을 무심히 지나쳐 테라스가 있는 붉은 벽돌집 앞에 섰다. 연애를 시작하던 무렵, 정현이와 함께 케이블카를 타던 날 들렀던 그 카페였다.
우리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마주 앉아 케이블카를 탔었다. 나는 너무 높아서 무섭다며, 소년처럼 신이 나 있는 정현이의 팔을 꼭 붙들었다. 아마 우리는 그 날 첫 키스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날의 붉어진 뺨처럼, 쉴 새 없이 두근대던 가슴처럼 달콤한 카페 모카를 주문했었다. 휘핑 크림을 잔뜩 얹어서 마치 아이스크림처럼 보이는 카페 모카를 말이다. 하지만, 방금 나는 카운터 앞에 서서 망설임 없이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카페 모카와 아메리카노 만큼이나 다르다.
새삼, 옛 연인과의 재회가 이렇게 사심 없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현이와 헤어진 지도 어느덧 삼 년. 우리는 그 후로도 가끔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몇 달에 한 번 정도는 꼬박꼬박 만나서 새로 생긴 고민이 무엇인지,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심지어는 새로운 애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하긴, 나와 정현이 둘 다 그 새로운 애인이라는 사람들과 빠르게 이별을 고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야, 너는 어째 백 일을 못 넘기냐.”
“뭐래, 너 지난 번 남자친구랑 한 달도 못 채우고 헤어진 거 기억 안 나?”
정현이는 자연스럽게 내 몫의 아메리카노를 주문했고, 나 또한 습관처럼 정현이 몫의 카페 라떼를 주문했다. 그러고 나면 왜 네가 내 것을 시키느냐며 투닥거릴 차례다.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도 익숙해져 있었다.
나는 아직도 내가 처음으로 정현이 앞에서 카페 모카 대신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던 날을 기억한다. 정현이가 주문한 카페 모카를 취소하고, ‘아메리카노 주세요.’라고 힘주어 말했다. 곧바로 ‘나 이제 아메리카노 마시는 여자야.’라고 농담을 건네려 했는데, 오랜만에 만났더니 입맛마저 바뀌었느냐고 묻는 정현이는 왠지 모르게 우울해 보였다.
그 때, 나는 내가 내심 정현이가 나 때문에 새로운 연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사이의 불문율에 속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진지해지는 순간 여느 헤어진 연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서로를 피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다 함은, 그 사이의 공백 기간 동안 서로의 향기를 잊기 위해서다.
아메리카노 한 잔과 한 시간은 찰떡궁합이다. 여섯 시 십 분 전. 어김없이 휴대 전화가 울렸다. 정말,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내가 변하려고 기를 쓰는 동안, 정현이는 우리들의 달콤했던 향기를 잊지 않으려 애를 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야.”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 한 마디는, 정현이가 입버릇처럼 내게 했던 말이다. 입가에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옛 연인과의 재회가 사심 없을 수 있겠는가. 나는 지금 향기를 나누러 간다.
사람은 얼마만큼의 기억을 얼마나 똑똑히 저장할 수 있을까?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태교를 통해 어떤 것을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 4세 이하의 어린 시절은 기억에 없다. 아무리 기억을 해내려고 해도 머릿속은 텅 비어 있을 것이고 기억이 나는 것 같은 착각은 아마 어릴 적 모습을 담아둔 사진첩을 통해서 유추해 낸 단편적인 조각들일 것이다.
할머니의 기억력은 점차 감퇴되셨다. 처음에는 그저 노화의 한 부분이리라 생각하셨다고 했다. 아이를 출산 하면 기억력이 조금 떨어져 자주 깜박깜박 하신다고 하는데 우리 할머니는 열 두 남매를 출산 하셨으니 그럴 만도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할머니께서 노인성 치매를 앓고 머지않아 급격히 상태가 나빠지셔서 생각보다 빨리 하늘나라로 가버리셔서 그런지 엄마는 항상 도끼빗으로 머리를 콕콕 두드리시며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을 반복해서 읽으셨다. 그리고는 심심풀이라면서 고스톱으로 하루 점을 치시기도 하셨다. 화투가 치매예방에 좋다나. 엄마는 염려하는 것 보다 기억력이 좋았다. 어쩌면 우리 집에서 가장 많은 것을 세세하게 기억하는 사람도 엄마밖에 없다고 할 정도였다. 심지어는 내가 어렸을 때 동네에서 말 타는 아저씨를 따라 갔을 때 입었던 초록색 멜빵바지를 다 기억하고 계실 정도였다.
그런데 엄마가 너무 정신건강에만 열중을 한 탓일까 엄마를 괴롭힌 병은 머릿속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 엄마 몸속에 침투한 몹쓸 암덩어리. 엄마는 자궁암판정을 받았다. 의사도 엄마의 상태에 대해 급격히 나쁘다 혹은 호전될 가능성이 높다는 등의 확실한 입장을 표명하지 못했고 일단 입원을 하고 치료를 받으며 상태를 보자고 했다. 이렇게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의사의 멱살이라도 잡아끌며 당장 수술이라도 하라고 악을 쓰고 싶었지만 의사의 지나친 냉담한 태도에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엄마는 다른 아닌 암이라는 말에 상심이 큰 듯했다. 나는 어렸을 때 엄마가 없는 상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때 눈물이 날까 눈물이 나지 않을까를 생각한 적이 있다. 물론 눈물이 나겠지로 생각을 마무리했지만 이렇게 막상 엄마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 조그마한 눈에 눈물이 넘치도록 고였다. 엄마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집에 가서 입원을 위한 옷가지 몇 벌과 생활필수품들을 챙기고 다시 병원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당신 마음도 채 추스를 시간도 없이 나머지 가족들에게 어떤 말을 꺼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먼저 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대뜸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바다를 갈 여건이 되지 않았기에 나는 가까운 갈치호수로 엄마를 모셨다. 엄마는 한동안 호숫가를 바라다보았다.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시고 계실까? 현재 엄마의 상황에 대한 원망의 생각일까 아니면 벌써부터 드는 두려움일까 혹은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엄마, 괜찮아. 항암치료 받으면 암세포도 줄어들고 수술하고 나면 싹 다 사라질 거야. 그러니까 마음 굳게 먹고. 응?”
“응”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난 다 잘 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하나도 안 무서워. 엄마도 그랬으면 좋겠어. 긍정적인 생각들만 하라고.”
“그래. 할머니가 보고 싶네, 갑자기.”
“갑자기 할머니는 왜. 자꾸 슬픈 소리만 할 거야? 그러지 말고 우리 저기 간장게장 집에서 맛있는 저녁이나 먹고 들어가자. 어차피 병원 들어가면 밍밍하고 싱거운 밥들만 계속 먹어야 할 텐데 오늘까지는 먹고 싶은 거 먹고 들어가서 열심히 치료받자, 응?”
“낙조가 보고 싶은데, 반월호수로 가자. 거기 가서 해 지는 것만 보고 들어가자.”
싫다는 나를 이끌고 엄마는 굳이 반월호수로 옮겼다. 마침 어둑어둑 해지더니 금세 해가 저물었다. 어쩐지 슬픈 기운이 엄마와 나 사이를 감도는 것 같아 집으로 가자고 하려던 차에 엄마는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떼었다.
“엄마, 잊어버리지 마. 그리고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도 잊어버리지 말고 다 기억해줘.”
“엄마 정말 이럴래? 자꾸 왜 슬픈 얘기만 하는 건데?”
나는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고 엄마도 흐느껴 우셨다. 해가 진지 오래되었지만 엄마와 나는 잊지 않으리라는 약속만 되풀이하며 자리를 쉽게 떠나지 못했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고 푸른 잎사귀가 넘실거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손에는 낯익은 지도와 어깨에는 큰 배낭을 짊어진 남자가 자동차에서 내렸습니다. 레오라는 이름의 요리사였지요. 레오는 세계를 돌며 수많은 요리를 연구하고 만들어왔지만, 한국요리만큼 레오의 입맛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리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늘 한국요리를 연구하고 만들어왔지만 한국의 전통음식과는 오묘하게 다른 느낌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레오는 얼마 후 미국 열리는 세계적인 요리경연대회에서 당당히 자신이 만들어 낸 한국요리를 선보이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오래전 먹었던 한국 음식의 맛이 나지 않아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지요. 그렇게 고심만 하던 레오는 직접 한국에서 그 맛과 비결을 찾고자 하였습니다. 한국에 도착한 레오는 이곳저곳을 물어물어 다니며 최고의 재료와 맛을 찾아 떠났습니다. 전국 팔도를 다 돌았지만 이렇다 할 만큼의 특별함을 찾지 못한 레오는 상심하여 돌아가려고 하다 우연히 예전 미국에서 만난 친구 태서의 고향인 정선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밤이 되어도 화려한 불빛이 꺼지지 않고 자신과 비슷한 외모의 외국인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레오는 이곳이라면 최고의 맛과 비결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되찾았지요. 그런데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술과 게임에 정신이 팔려있었고 한국요리보다 외국 요리들이 더 많이 있었습니다. 실망한 레오는 터덜터덜 길을 나섰지요.
그런데 그때였습니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보았지요. 그곳은 온갖 나물들과 생활용품을 파는 작은 시장이었습니다. 파란 눈에 노란 머리를 가진 외국인이 신기했는지 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레오를 신기하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런 레오의 눈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물건을 사고팔고 시장 한편에서는 광대 분장을 한 사람이 가위를 두들기며 무엇인가를 팔고 또 다른 옆에는 저마다 한 그릇의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이 신기하게만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시끄러운 소리에 사람들로 복잡한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밥 한 그릇을 쓱 내밀더니 한 아주머니께서 말했습니다.
“노란 머리 총각, 밥은 먹었나? 이거 한 그릇 먹고 가, 배고플 텐데”
아주머니는 레오가 말을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연신 웃는 모습으로 그릇을 내밀었지요.
레오도 낯선 사람과 문화가 어색하였지만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아주머니의 성의를 거절하기가 미안해서 많은 사람 틈에 앉아 밥 한 숟가락을 떠먹었습니다. 별 볼 일 없다고 느낀 밥맛이 꿀맛처럼 느껴졌습니다. 밥에 들어간 재료를 살펴보니 흰 쌀밥과 나물 그리고 고추 양념을 한 간장 정도 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좀 더 시장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시장을 찬찬히 둘러보니 아까 그 밥에 들어있던 나물도 보이고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전도 보였습니다. 신이 나는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각종 산에서 나오는 나물들을 팔았습니다. 나물을 사는 사람들은 큰 봉지를 손에 들고 있었고 나물을 파는 아주머니는 나물을 한 움큼 더 집더니 봉지에 담아주었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은 소박하지만 하나같이 행복한 웃음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조심스럽게 아까 먹은 밥이 무엇인지 물어보니 곤드레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더니 봉지 하나 가득 담아주며 말했습니다.
“이렇게 멀리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네. 총각, 밥 맛있게 먹었다니 그것도 고맙고.
집에 가거든 우리나라 그리고 여기 정선 5일장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고 호호호”
레오가 돈을 내밀자 아주머니께서는 사양하시며 빙그레 웃고는 돈은 다음에 올 때 달라고 하였습니다.
레오는 서툴게 감사함을 전한 뒤 마을을 떠났습니다. 얼마 후 레오는 세계요리경연대회에서 한국인의 마음이라는 제목의 음식을 선보였습니다. 소박하지만 정성스럽게 차려낸 밥상에는 곤드레 나물밥과 메밀부꾸미, 그리고 김치가 있었습니다. 다른 요리들에 비해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누구의 요리보다 특별했습니다.
지금도 레오의 마음에는 그날의 기억이 선명히 남아있습니다. 웃으며 밥 한 그릇을 건네주던 아주머니의 미소 그리고 정선 5일장의 많은 사람의 행복한 웃음소리 말입니다.
엄마한테는 짭조름한 냄새가 난다. 그것은 땀 냄새도 아니고 엄마 한테서만 풍기는 엄마냄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슈퍼맘이나 워킹맘이라는 단어가 선풍적으로 쓰인 때가 있었다. 육아와 직장생활을 병행하는 엄마들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슈퍼우먼을 뜻하는 말이었다. 나는 엄마를 생각하며 우리 엄마가 슈퍼맘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로 자식들을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슈퍼맘들은 자신의 선택으로 슈퍼맘의 길에 접어들었겠지만 우리 엄마는 등 떠밀려 슈퍼맘이 되어야했다. 자식들을 굶기지 않고 공부시키려고 엄마는 참 열심히 일했다.
처음부터 식당을 개업한 것은 아니었다. 동네의 조금 큰 한식당에서 주방 설거지를 하고 홀 서빙 일부터 시작했다. 식당이 문을 여는 아침 일찍부터 나가서 식당이 문을 닫는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엄마는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의 손은 항상 부르트고 거칠었다. 사실 엄마와 같이 살면서도 함께 시간을 보낸 기억은 거의 없었다. 학교에 가려고 일어나면 엄마는 이미 식당에 가신 후라 아침상만 덩그러니 있었고 밤에는 엄마를 기다리다 먼저 잠든 적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해를 더 식당에서 일을 한 엄마는 이듬해 봄에 작은 한식당을 열었다. 식당에서 음식판매뿐 아니라 반찬을 함께 팔기도 했다.
엄마는 외할머니를 닮아 요리솜씨가 있다고 했다. 엄마는 음식에 있어서 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며 소금을 가장 깐깐하게 생각했다. 엄마는 메인 요리와 함께 나가는 밑반찬들을 직접 만들었으며 식당을 찾는 사람들은 밑반찬이 깔끔하고 맛있다며 종종 구매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환갑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계속 일을 고집하는 엄마에게 이제 그만 쉬라고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사람이 하던 일을 안 하고 집안에만 있으면 빨리 늙는 거라고 했다. 하긴 지금까지 엄마의 삶에는 조금의 쉼도 없었다. 늘 바쁘고 억척스럽게 살아왔던 삶이라 여유라는 쉼이 엄마에겐 어떤 것보다 낯설기도 할 것이다. 엄마의 삶을 봐왔던 동네 아주머니들은 누가 짠돌이 아지매 아니랄까봐 자식농사 풍년인데 뭣하러 지금까지 고생이냐고 했고, 엄마는 “짠돌이 어디 가나요. 그러지 말고 계모임 같은 거 있으면 다른 식당 가지 말고 우리 식당으로 와요”하며 웃음만 지었다.
사람들은 엄마를 짠돌이 아지매라 불렀다. 엄마와 나의 공통점을 찾으라면 아마 짠돌이라는 별명에서 일 것이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용돈을 참 적게 주셨다. 그래서 돈을 아끼고 아껴야만 겨우 학교 준비물을 살 수 있을 정도였다. 학교 문구점에서 파는 100원 200원짜리 불량식품도 내겐 사치였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고등학교 때까지 내 별명은 짠돌이였다. 물론 지금도 짠돌이라고 부르는 친구들이 있다. 지금은 여유 있는 생활을 할 만큼 벌이가 괜찮아 졌지만 여전히 돈을 허투루 쓴 적이 없다. 아마 나도 나이가 들면 엄마처럼 짠돌이 아지매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침부터 엄마가 분주한 걸 보니 반찬으로 나갈 배추겉절이와 오이소박이, 각종 나물을 만들려는 모양이었다. 가끔 회사에 월차를 내는 날이면 엄마를 도와 반찬을 만들며 식당일을 돕는다. 엄마는 반찬을 만들 때에도 항상 ‘소금’의 중요성을 연설했다. 싱싱하고 좋은 재료만큼 음식의 풍미를 돋우어주는 소금의 선택이 맛을 좌우한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신안에서도 가장 좋은 천일염만을 고집했다. 나는 이런 좋은 소금 쓴다고 누가 알아주기나 하냐고 했지만 엄마는 식당을 찾는 손님들의 입맛은 귀신보다 더 무서운 법이라고 했다. 간 하나에 발길이 이어지고 끊기는 일이 다반사였고 칭찬과 쓴 소리가 좌우되는 것이라고 했다. 질 낮은 소금을 쓰면 음식이 텁텁하고 쓴 맛이 감돌며 질 좋은 천일염을 쓰면 깔끔하고 풍미 있는 깊은 맛을 낸다고 했다.
엄마의 고집은 소금만큼이나 짭짤했다. 질 좋은 소금을 써서 일까 사람들은 엄마의 음식솜씨를 칭찬했고 ‘짠돌이 아지매’ 식당을 찾는 사람들도 부쩍 많아졌다.
엄마가 일을 갔다 돌아오면 엄마 특유의 짙은 냄새가 났다. 엄마에게 풍기는 짭조름한 냄새도 질 좋은 천일염처럼 기분 좋은 엄마 고유의 냄새로 기억될 것이다.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수산시장의 하루가 시작된다. 얼음을 나르며 생선들에게 오늘 하루도 잘 부탁한다는 말을 건넨다. 수산시장만의 비릿한 냄새가 이제는 익숙한 사람들은 손에 물이 안 묻는 날이 없다. 겨울이면 옷을 겹겹이 껴입어봐도 고무장갑 사이로 들어오는 냉기 때문에 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한두 번이 아니다.
가지런히 정돈된 생선들과 횟감을 둘러보는 사람들 사이로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오늘 횟감 좋아요~ 사장님 한번 둘러보고 가셔.”
준영은 멀리서 엄마가 장사를 하시는 걸 보고만 있다. 손님이 엄마의 손을 냅다 뿌리치고 나서야 엄마에게 슬며시 다가갔다.
“여긴 또 뭐 하러 와. 공부하라니까. 이 좋은 옷에 비린내 배겠다.”
“오늘 장사 많이 했어? 추운데 얼른 접고 같이 들어가자.”
“무슨 소리, 너는 얼른 공부하고 나는 얼른 장사하고 그게 우리가 할 일이야. 그만 가봐. 엄마 일 해야 해.”
준영은 엄마를 주려고 가져온 손난로를 채 건네지도 못하고 돌아섰다. 준영은 노량진에서 고시공부를 하고 있다. 이따금씩 엄마를 보러 수산시장에 오면 엄마는 옷에 냄새 밴다며 한사코 돌아가라고만 한다. 생선박스나 얼음은 덩치가 큰 장정들도 혼자 옮기가 힘든데 엄마는 번쩍번쩍 잘도 든다. 여자는 약하나 엄마는 강하다는 말이 이런데서 나오는가 싶다.
엄마가 내색은 안 해도 내가 수산시장에 가면 옆 상회 아주머니들께 장차 나랏일을 할 우리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이따금씩 공부하는 것이 지겨워 ‘노량진’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치열하게 공부하는 사람들과 더 치열하게 생선을 파는 사람들. 어쩐지 엄마와 준영이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엄마에게 손난로를 건네주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는지 엄마는 그날 심한 열감기에 걸리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일을 나가시겠다며 완고하게 고집을 부리시는 통에 하는 수 없이 엄마를 모시고 시장으로 나갔다.
“너는 이제 올라가봐. 들어오지 말고.”
“오늘은 제가 도울게요. 엄마는 병원 다녀오세요.”
“병원은 무슨, 감기 가지고. 여기만 오면 다 낫는다. 여기가 엄마한테는 병원이다.”
말은 그렇게 해도 엄마는 내심 내 손을 뿌리치지는 않으셨다. 오늘 하루는 공부 말고 엄마를 돕기로 하고 방수 앞치마에 장화, 고무장갑까지 끼며 생선들을 정리했다. 생선 종류가 하도 많아 어떤 게 어떤 것인지 듣고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오늘 생선 정말 싱싱해요. 어찌나 싱싱한지 펄떡거리는 거 잡다가 손목 부러질 뻔 했다니까요!”
“허허, 젊은 청년이 말도 잘하네. 키로에 얼마라고?”
“헤헤, 3만원만 주세요. 큰놈으로 골라 드릴 테니까 어서요.”
준영이 손님을 끌어오면 엄마가 회를 떴다. 엄마는 그 와중에도 손님에게 장차 나랏일을 할 사람이 골라준 생선이라며 쓸데없는 생색을 내셨다. 엄마는 빨간 코끝에 하얀 콧물이 맺힌 줄도 모른 채 생선 내장을 발라냈다.
잠시 손님이 뜸했다.
“엄마는 여기 이 냄새 그리고 생선 지겹지도 않아?”
엄마는 잠시 손난로를 만지작거리시더니 아니 라고 짧게 대답하셨다.
“나는 가끔, 아주 가끔 이 노량진이 지긋지긋해서 나가고 싶은 적도 있었는데. 엄마는 없다고?”
“지긋지긋 하지. 나라고 왜 아니겠어. 그래도 여기만큼 활기 넘치고 싱싱한 곳이 없어. 제철이면 제철 맞은 생선들이 파닥이고, 엄마는 이 비린내 흉이라고 생각 안 해. 나한테 주는 훈장이지 훈장.”
“근데 왜 나는 옷에 비린내 나니까 못 오게 해?”
“그게 너랑 나랑 같은가. 엄마는 여기가 일터고 너는 일터가 따로 있지 있으니까 그렇지. 그나저나 오늘 엄마 땜에 공부 하나도 못해서 어쩌냐. 곧 시험이라며.”
“하루 안했다고 떨어지는 실력이면 시험 봐도 그만이야. 오늘 공부보다 더 값진 공부 했는데 뭐.”
엄마는 껄껄 웃으셨다. 모처럼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가슴 한 편이 뭉클했다.
비린내 가득하지만 싱싱함과 마주한 이곳. 노량진. 우리 모자에게 노량진은 그런 곳이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거실이 시끌시끌했다. 방 안에서 잠시 무슨 소린지 들어보니 손자가 어딜 놀러 가자고 조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거 그냥 가고 싶은 데 가게 두지 그러냐.”
내 말에 며느리가 손사래를 친다. 학교에서 고장의 이름 난 장소에 가 보고 기행문을 써 오라고 했다는데, 글쎄 수혁이 고 놈이 용인하면 에버랜드 아니냐며 놀이동산에 가겠다고 떼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민속촌에 가면 어떻겠냐는 며느리의 말에, 손자는 민속촌에 가겠다고 한 친구가 반에서 열 명이 넘는다며 싫단다. 며느리는 또 에버랜드도 반 친구들이 스무 명은 가겠다며 되받아치고, 실랑이가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게다가 때마침 일터에서 돌아온 아들놈은 할아버지까지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실 수 있는 곳으로 다 같이 가자고 하니, 이것 참 큰일이다.
수혁이는 토라진 듯 방에 들어가 한참이나 컴퓨터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다들 마음에 들어 할 거라면서 개선장군처럼 방문을 박차고 나왔다.
결국 주말에 나서기로 한 곳은 호박등불마을이었다. 다른 것은 제쳐두고, 일단은 이름이 참 마음에 들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를 묻자 수혁이가 손을 번쩍 들고 대답한다.
“여기가 호박도 유명하고, 등잔 박물관도 유명하고, 또 숯가마도 유명하대요! 그런데 전 은하초코기사단 가서 초콜릿 만들 거예요!”
“그건 안 돼. 엄마가 벌써 호박 떡케잌 만들기 체험 신청 해 놨거든.”
차 안에서 또 한 바탕 난리가 났다. 아들은 그냥 하하 웃는다. 시끌벅적한 것이 우리 집의 장점이기는 하다만, 무슨 일을 벌일 때마다 이렇게 난리가 나니 늙은이로서는 귀가 아파 견디기가 힘들다.
내 행선지는 벌써 등잔 박물관으로 정해진 모양이었는데, 내가 적적할까봐 아들이 같이 가겠다는 것을 그냥 수혁이랑 수혁이 엄마 따라 가라고 보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수혁이는 엄마랑은 말도 하지 않겠다며 호박등불마을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도 입이 비쭉 나와 있었다. 아들이 가서 중재를 해 주지 않으면 기껏 신청했다던 체험 학습도 다 망치고 올 판이었다.
호박등불마을 체험장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등잔 박물관이었다. 체험장으로 들어가는 수혁이와 아들 내외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등잔 박물관으로 향했다. 등잔이라고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렜다.
내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수십 여 년 전 쯤에 어머니는 호롱불을 밝히고 바느질을 하셨다. 따뜻하게 데워진 아랫목에 어린 아들을 소중히 뉘이고 밤이 늦도록 다소곳하게 앉아 옷감들을 매만지셨다. 이제는 어머니라는 단어가 새삼스럽다. 물론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말을 입 밖에 낸 적은 없지만, 수혁이와 며느리가 투닥거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종종 부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머니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를 생각하고 감정이 북받쳐 오를 시기는 진즉에 지났다. 다만, 호롱불 아래 일렁이던 어머니의 그림자와 고운 옆모습을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장승과 연못가의 석탑을 거쳐 걸으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괜히 뒤를 돌아다보며 혹시 수혁이랑 아들 내외가 시간 저편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을 했다. 내가 등잔불 아래의 열 살 배기로 돌아가 버린다면, 지금 저 귀여운 열 살 배기도 사라져버리겠지. 웃음이 나왔다. 암, 할애비는 그냥 수혁이 할애비지.
씩씩하게, 하지만 느린 걸음으로 박물관을 돌아보았다. 어머니의 냄새가 시간을 건너온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박물관 앞마당에 앉아 정원을 바라보고 있자니 저만치서 수혁이가 달려와 입에 뭘 쑥 넣어준다.
“할아버지, 내가 만들었어요!”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며느리가 ‘저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하고 쫓아오는 통에 수혁이가 도망을 친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껄껄 웃었다.
요즘 들어 남편이 수상하다. 대중가요에서였나 님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만 찍으면 남이 된다더니 20여년을 가까이 살 맞대고 살았는데 의심의 불씨는 생각보다 빠르게 번져나갔다. 남편은 오로지 한 길밖에 모르고 살았다. 가정과 직장. 성실하나로 친정 부모님의 마음을 사로잡고 뚝심 있게 밀어부처 결혼까지 골인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요즘의 남편은 수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얼마 전 만난 고등학교 동창애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빙빙 맴돌았기 때문이다.
“얘, 남자는 다 똑같더라. 우리 남편은 아니겠지. 우리 애 아빠는 그럴 리가 없어라고 생각했는데 뒤에서 딴 주머니 차고 다니는 게 남자라니까. 글쎄 세훈이 엄마 알지? 그 집도 이번에 이혼한다고 난리잖아.”
“어머, 왜?”
“왜긴, 여태 뭐 들었니? 딴 주머니 찼다니까. 글쎄 뭐라더라? 등산모임에서 둘이 눈이 맞았다나? 아무튼 뒤돌아서면 딴 생각하는 동물이 남자라는 동물이라더니. 세훈이 아빠 병수발 다 받아낸 게 세훈이 엄마인데 건강 생각한다면서 다닌 등산모임에서 바람이 날 줄 누가 알았겠니?”
“어머, 어머. 세훈이 엄마 어떻게 하니.”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위자료나 왕창 뜯어내고 갈라서는 거지. 간통죄로 안 처넣은 게 다행이라나 뭐라나.”
동창애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언행이 점점 거침없었다. 동창애의 언행처럼 나의 의심도 거침이 없었다. 남편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둥, 셔츠 옷깃을 살피는 등의 드라마에서나 나올 것 같던 행동들을 내가 하고 있었다. 남편의 휴대전화에는 모르는 번호들이 적혀있었고 퇴근하면 바로 퇴근하던 남편은 요즘 새벽에나 들어왔다. 어딜 다녀오는 것이냐고 해도 답이 없었고 술을 마신 것 같지 않은 것이 회식도 아닌듯했다. 자고 있는 남편의 얼굴을 보니 비참한 마음이 들었다. 슬쩍 거실에 나와 서 있는데 남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이때다 싶어 문자를 열어보니 오늘도 수고 많았다고 집 앞까지 데려다 줘서 고맙다는 등의 문자가 와있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에게도 이야기 할 수 없음에 더 서글퍼졌다.
날이 밝았다. 새하얗게 밤을 지새우니 두 눈이 퀭했다. 어쩐지 잠을 한 숨도 못잔 나보다 남편의 얼굴이 더 퀭해보였다. 속으로는 두 집 살림 하려니 힘들기도 하겠지라며 비꼬았으나 아직은 내색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이렇다 할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남편이 씻으러 들어갔을 때 어제 밤에 문자를 보낸 사람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당연히 어떤 여편네가 받겠지라는 생각을 했건만 멀쩡한 남정네가 전화를 받았다.
“저, 혹시 김영훈씨 아세요?”
“네? 김영훈이요? 누구시죠? 전 그런사람 모르는데.”
“네? 어제 김영훈씨한테 수고 많았고 집 앞까지 데려다 줘서 고맙다고 문자 보내시지 않으셨어요?”
“아~ 대리기사요?”
전화를 받은 남자의 입에서는 대뜸 남편을 대리기사라고 불렀다. 큰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멀쩡히 직장 잘 다니는 남편이 왜 야간 대리운전을 뛰고 있는가. 왜 나에게는 일언반구 아무런 말도 없이 투잡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씻고 나온 남편이 채 옷을 다 꺼내 입기도 전에 따져물었다.
“당신 뭐야? 당신 밤에 대리기사 뛰어? 도대체 왜? 당신이 왜!”
“당신 내 휴대전화 뒤져봤어?”
“지금 그게 문제야? 왜 대리기사를 나한테 아무런 말도 없이 하고 있냐고 왜!”
나는 남편에게 울부짖으며 악을 썼다. 그간 남편을 의심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남편이 왜 힘든 시간을 홀로 보내게 내버려두었나 하는 자책감이 얽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만 한 사정이 있었으니까. 이제 얼마 안 남았어. 곧 그만 둘 거야.”
남편은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고 자리를 회피했다. 하루종일 넋이 나가 멍청하게 소파에 앉아있는데 친정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얘, 나다. 김서방한테 고맙고 미안해서 어쩌니. 내가 손 벌릴 곳이 없어서 너네한테까지 손을 다 벌리고. 김서방 덕분에 다행히 급한 불을 껐다고 전해줘. 너도 마음고생 많았지? 조만간 집으로 와. 맛있는 저녁 해 줄 테니까.”
“엄마, 그게 다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이야기 해봐.”
“어머, 너 몰랐니? 내가 얼마 전에 급한 목돈이 좀 필요해서 전화했는데 김서방이 받더라고, 그래서 너랑 잘 상의해서 돈 좀 구할 수 있겠냐고 했지. 그랬는데 넌 모르고 있었니?”
남편은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괜히 친정 부모님 걱정할까봐 내 통장 하나 건드리지 않고 혼자 그 목돈을 구하려 대리운전까지 했던 거다.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 남편은.
자정이 넘어서야 남편은 축 처진 어깨를 하고 들어왔다. 나는 말없이 남편을 꼭 안았다.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런 내게 남편은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이 정도도 못하면 어디 쓰겠냐고 한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나는 남편과 다시 하나가 되어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