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원을 그려보았다. 손끝을 따라서 동그란 원이 그려졌다. 그리고는 나무를 향해 말했다.
“나는 일곱 살이야. 너는? 너는 나이가 많으니?”
그리고는 밟아도 소리 나지 않고 발이 푹푹 빠지는 아주 고운 모래에 다시 동그마니 원을 그렸다. 손끝을 따라 그려지는 원은 모래에 나이테가 그려지는 듯 동그랗게 또 동그랗게 그려져 나갔다. 여러 개의 원이 모이니 톱니바퀴 같은 느낌도 들었다. 어린근원의 손끝에 흐르는 동심원은 점점 더 퍼져나갔다.
근원은 등산화 끈을 조금 당겼다. 오늘은 등산 동호회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A, B팀으로 나뉘어 각자 배정된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근원은 A팀에 배정되었고 아침으로는 김밥과 음료수, 물이 주어졌다. 아주머니들은 삼삼오오 남편과 자식들 이야기로 버스를 가득 메웠고 근원은 홀로 창가쪽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는데 오늘의 사회자로 나선 남자가 마이크를 잡으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근원은 목적지까지 조용히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대다수의 입장에 반기를 들 용기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신경을 다른 데로 쏟기 위해 근원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미리 챙겨온 시집을 꺼내들었다. 친구 따라 얼떨결에 한두 번쯤 나가본 시사랑 동호회에서 추천받아 사게 된 시집이었다. 시를 잘 모르는 그였기에 어쩌면 시를 더욱 잘 읽고 느낄 수 있었다.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노송’이라는 제목의 시가 등장했다. 8줄 내외로 간략하게 쓰인 시에는 늙은 소나무에 대한 작가의 영감이 손끝을 타고 강렬하게 전해지는 듯했다. 읽기 어려운 점이 없었음으로 근원은 비교적 잘 쓴 시라고 생각했다. 평소라면 한번 읽고 밀려오는 졸음에 정신을 내어주고 목적지까지 다다랐을 그였지만 근원은 자신이 시를 쓰는 작가라면 늙은 소나무를 가지고 어떤 시를 써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자꾸만 읽었던 시가 머릿속에 맴돌아 근원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근원은 머리를 흔들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몸짓이었다.
‘늙은 소나무라. 소나무는 원래 좀 늙지 않았나? 어디를 돌아다녀보아도 1,2년 된 소나무는 거의 못 본 것 같은데. 한 400년쯤은 되어야 하지 않나?’
근원은 속으로 속삭였다. 속으로 말하는 것이라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근원은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도착 10분 전입니다. 오늘 저희가 가기로 한 곳은 산이 아니라 트레킹 코스이기 때문에 크게 힘든 점은 없으리라 봅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므로 단단히 준비하시고 내리셔서 일사분란하게 모여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소나무가 정말 예술입니다. 오백년 된 소나무가 있다고 하니까 그곳에서 사진 찍으시면 되겠습니다. 자. 이제 차가 멈춰서면 내리세요.”
사회를 맡았던 남자는 도착 10분전을 알리며 깔끔하게 정리멘트를 보냈다. 근원도 잠시 생각을 접고 내릴 준비를 하였다. 오늘은 모처럼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산 따라 물 따라 걷는 트레킹 코스였다. 사회자 남자의 말에 의하면 오백년 된 소나무가 있다고 했다. 남자는 차안에서 읽은 시를 떠올렸다.
날이 맑아서인지 사람들이 꽤 많았다. 우리 동호회 사람을 제외하고도 많은 인파가 색색 깔의 등산복을 입고 소나무 숲길을 걷기위해 몸을 풀었다. 간단히 준비운동을 한 뒤 각각 흩어져 걷기 시작했다. 송림이 우거진 숲에 다다르자 길게 뻗은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그 자태를 뽐내었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의 탄성이 들려왔고 근원도 잠시 발걸음을 멈추어 소나무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오백년 된 늙은 소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노송이라’
근원은 머릿속에 시를 그려나갔다.
늙은 소나무
너는 말없이 늙어있구나
너의 늙음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너의 몸에 동그라미를 그려나갔구나
지나간 세월만큼 너는 늙어있구나
굵은 기둥은 단단하고
네 몸뚱이에서 풍겨오는 짙은 냄새가
너의 늙음을 대신하는 구나
근원은 다시 한 번 흙바닥에 동그마니 원을 그려보았다. 어린 근원이 모래바닥에 작은 동심원을 그려 넣듯이 늙은 소나무 앞에서 동심원을 그려나갔다.
세월이 변하고 강산이 변하여 내가 사는 모습 또한 이전과는 많이 다르다. 태백산맥 말단의 백양산에 자리를 잡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 내 상세히 기억하지는 못한다.
백 년을 사는 속세의 사람들은 하루를 단위로 가치를 매기나, 수천 년을 사는 내게 하루하루는 덧없이 흐르는 세월 속의 한 자락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는 내 명도 다하여 백양산 어느 언저리에 조용히 젖어 들고자 하니, 눈에 띄는 것은 천 년 전이나 다름없이 운수사 뿐이라.
이 절이 처음으로 지어지던 날 또한 내 상세히 기억하지 못한다. 여느 때처럼 산을 한 바퀴 휘이 돌아 잠을 자러 가던 차에, 가야국의 사람 몇이 서까래가 될 나무들을 날라 오던 모습만이 희미하게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다. 잠시 몸을 숨기고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엿들어 보았었다.
“이곳에서 상서로운 운하가 피어오르는 걸 보았다는 게 정말인가?”
“그럼. 나는 본디 가락에 살던 사람이라 이 산을 자주 올려다보았네. 아침이면 이곳에서 흰 구름이 피어오르고 꽃 무지개가 뜨는 것을 가락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았지.”
“그것 참 신통한 일일세. 아마 이 곳에 신선이 살고 있나 보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만 껄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수천 년을 살아온지라, 내가 기침하여 하품을 할 때면 흰 구름이 피어오르고 기지개를 켤 때면 꽃 무지개가 뜨는 것을 가야국의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긴 모양이었다. 이 깊은 산중까지 내 흔적을 찾아올 생각을 한 것이 참으로 기특하여 운수사가 완공되었을 때, 이곳을 복전으로 만들어 줄 복두꺼비 한 마리를 몰래 내려 주었다.
그런데 운수사 터는 자꾸 넓어져만 갔다. 소원을 들어 준다는 영험한 두꺼비 바위를 찾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한 끼의 공양을 짓는 데 쌀뜨물이 운수 계곡을 거쳐 십 리나 떨어진 모라 마을까지 흘러내릴 정도이니, 이 정도면 과하다 하겠다. 가야인들의 심성이 선하여 자연을 해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으나, 매일같이 인파가 다녀가니 내 몸 하나 편히 누일 곳이 사라져 가더라. 내 용왕과도 각별한 사이인지라 산신각 대신에 용왕각을 지은 것은 개의치 않으나, 날이 갈수록 산중이 소란스러워짐은 쉬이 참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내 중히 여기던 산의 한 자락을 기꺼이 내어 주었거늘, 어찌하여 산을 이리 마음대로 누리는가. 산중을 거니는 것이 유일한 내 귀에 매일같이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오니, 내가 견디기가 힘들어지는구려.”
벼르다 못해 주지 스님의 꿈에 나타나자 선한 주지 스님이 예상치 못한 호령에 황망해 하더라. 고민 끝에 주지 스님이 두꺼비 바위의 턱을 깨어 버리자, 본디 용왕에게서 맡아 바위 안에서 기르던 청사자 한 마리가 그대로 떠나 버렸다. 용왕께 돌려보낼 때가 되었다 생각하고 있었으나, 갑작스런 일에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한동안 구름이 피고 무지개가 뜨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으니, 사람들의 발길이 점차 줄고 종국에는 사세가 기울어 가더라. 미안한 마음에 세진당 모퉁이에 팽나무 한 그루를 심어 두었다.
두꺼비 바위에서 도망친 청사자는 범어사로 갔다 하였다. 세월이 많이 흘러 이 운수사도 천년고찰의 칭호를 얻게 되니, 이 또한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왜적의 난으로 불에 탔던 건물도 모두 복원되었으나, 운수사의 낡은 처마 끝에 나와 함께 지내 온 세월이 그대로 묻어 나온다.
금정봉과 불웅령을 돌아 하천 줄기를 따라 낙동강까지 둘러보았다. 마실의 종착지는 언제나 운수사 대웅전 앞이다. 나와 함께 천 년을 숨 쉰 곳이니, 이 조용한 절에 녹아들어 신선으로서의 삶을 마감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 년을 숨 쉬어 온 절과 함께 천 년을 더 걸어갈 꿈을 꾸니, 마지막 꿈으로는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은 꿈이다.
내가 참 좋아하는 소리들 몇 가지가 있다. 보글보글 끓던 어머니의 된장찌개 소리, 지글지글 삼겹살이 익는 소리, 뎅그렁 하는 풍경 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몽돌해변의 자갈 소리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던 사람들이 ‘엥?’하며 반문해 오는 것이 바로 이 마지막 소리. 몽돌해변 자체를 모르는 것이다.
“야, 너희들이 해변을 몰라서 그래. 해변 그리라고 하면 모래사장만 그리지? 이 형님이 알고 있는 해변은 말이야…….”
말 그대로 주변에는 의외로 모래로 덮인 해변만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한 번 빠지면 빠져 나올 수 없는 매력을 지닌 것이 바로 이 몽돌해변, 그 중에서도 몽돌들이 파도에 구르면서 나는 자그락자그락 하는 소리다.
나는 몽돌해변 변두리의 작은 마을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이천 년대 초반, 아이들은 아직 컴퓨터로 게임을 하거나 인터넷을 사용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고마운 일이다. 그래서 매일 방과 후에 동네 아이들과 함께 몽돌 위를 달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어렸을 때에는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뭐든 재미있다는 말이 맞다. 예쁜 색의 몽돌을 찾는 것도, 제일 큰 몽돌을 찾아오는 것도, 똑같이 생긴 몽돌을 찾는 것도 모두 재미있는 놀이가 되었다.
그런데 해가 넘어가기 시작해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나는 여전히 몽돌해변에 있었다. 다른 지방에서 장사를 하셨던 부모님은 노을이 다 진 뒤에야 돌아오셨다. 혼자 집에 있는 게 무서웠던 깡마른 초등학생 꼬마는 몽돌해변에 앉았다.
자그락자그락, 파도가 몽돌 새를 스치며 묘한 소리를 냈다. 쌀을 씻는 소리 같기도 하고, 조개껍질이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했다. 햇볕에 따뜻하게 데워진 몽돌 위에 누워, 나는 한참이나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 여행은 몽돌해변으로 가자.”
여름방학을 맞아 여행 계획을 세우기 위해 모인 것이었는데, 난데없는 추억 얘기가 길어졌다. 머쓱해진 나는 ‘달궈진 모래에 몸을 파묻는 장난은 칠 수 없겠지만, 따뜻한 몽돌 위에 누워 있으면 온돌 침대가 따로 없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자! 재미있겠는데? 나도 정동진이나 해운대 같이 예쁘기로 소문난 해변은 많이 가 봤는데, 몽돌해변은 한 번도 안 가봤어.”
그런데 내 얘기에 빠져 있던 친구들이 모두 오케이 사인을 보내 왔다. 몽돌해변이 뭔지 모르는 친구들이 절반은 됐는데, 몽돌해변에 가 본 친구들이 줄줄이 말을 잇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앉은 자리가 몽돌해변 이야기로 들썩였다.
“몽돌이면 조약돌 같은 거지? 이름 정말 예쁘다. 돌 하나 주워 와도 돼?”
“당연히 안 되지, 임마. 너 같은 사람들 때문에 해변이 없어지는 거야. 대학생씩이나 돼 가지고 자연 망칠 생각부터 해?”
독설가로 소문 난 영민이의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거나, 나는 이렇게 해서 얼떨결에 몽돌해변에 가 보게 되었다.
울산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깜빡 잠이 든 나는 꿈을 꾸었다. 나는 오렌지 빛깔의 노을과 흑진주 같은 몽돌 사이에 누워 하루의 마지막 볕을 쬐고 있었다. 자그락자그락, 아이들의 작은 발이 몽돌 위를 달린다.
어디선가 ‘현규야, 밥 먹자!’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그 목소리도, 몽돌의 온기도 아주 따뜻했기 때문에 나는 꿈속에서 또 잠이 들어버렸다.
오늘로 단종께서 유배령을 받은 지 꼬박 닷새만이다. 한참을 걷고 또 걸어 겨우 주천에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단종께서는 심신이 매우 지친상태로 보여 걱정이 됐다. 겨우 12살인 단종. 역사는 어린나이에 숙부에게 왕의 자리를 내어주고 유배령을 받은 비운의 왕으로 기억할 것이다.
단종께서는 많이 지치셨는지 입이 바싹 말라있었다. 마을을 둘러보기도 전에 물 한 모금을 청할 곳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마을에 있는 조그마한 우물가를 발견하고 단종은 물 한 모금을 겨우 마시며 지친 몸을 풀어야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유배 행렬은 다시 이어졌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고 험준한 산을 올라야 했다. 행렬을 뒤따르는 우리는 물론 단종께서도 매우 지쳐있는 상태였으나 단종께서는 고갯마루에 다다르자 자신을 위해 죽어간 사육신을 떠올리며 궁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세상에 어떤 왕이 자신을 위해 죽어간 이들을 생각하며 흙바닥에 큰절을 올릴 수 있을까. 단종은 그저 고마운 마음을 전하려는 것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며 쓴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우리는 마침내 낡은 나룻배를 타고 외딴 섬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청령포라고 불리는 고즈넉한 곳이었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 우리에게는 수라를 올릴 궁녀도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울창한 소나무 숲뿐. 단종께서는 소나무로 우거진 섬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는 자신보다 정순왕후의 걱정을 먼저 하였다.
우리는 급하게 밭에서 옥수수와 메밀로 수라상을 올렸고 우리가 청령포에 도착한지 5일이 지난 후에야 궁녀4명이 도착하였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더 지나도 단종께서는 제대로 먹지도 잠들지도 못하였다. 한양에 남겨둔 정순왕후 때문이리라. 단종께서는 종종 뒷동산에 올라 정순왕후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며 탑을 세우곤 하였다.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지 못한 설움과 미안함으로 단종은 자주 눈물을 보였다.
그런데 이곳의 생활도 그렇게 길지는 못하였다. 홍수가 나 거처를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풍헌으로 유배지를 옮기자마자 한양으로부터 사약을 받으라는 명이 들려왔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한없이 많은 슬픔을 간직한 왕, 나의 왕이 죽음을 맞았다.
차마 슬픔으로 가득한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단종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하고 동강에 버려졌다. 단종의 시신을 거두고자 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포가 내려졌기 때문이다. 왕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신하로서의 예도 다하지 못하다니.
쉽사리 누구 하나 나서는 이 없던 그때 영월의 호장이었던 엄흥도가 소식을 전해왔다. 단종의 시신을 자신이 거두겠다는 것이다. 그의 단호한 전갈에 마음이 저려왔다. 진작 마음의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기 때문이리라.
급히 동강에 버려졌던 왕의 시신을 거두었다. 그리고 한동안은 쉽사리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엄흥도도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단종의 시신을 거둔 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전갈이 도착했다. 엄흥도가 생을 마감하였다는 내용이었다. 또 한 번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엄흥도는 그는 무심하게 솟아오르는 소나무가 되었으리라. 그리고 여전히 나의 왕 그리고 우리의 왕을 영원히 지키리라.
“너 상사화가 왜 상사화인줄 알아?”
“글쎄”
“에이, 그것도 몰라? 상사화는 말이야. 잎이 져야 꽃이 피고, 꽃이 져야 잎이 나는 꽃이야. 세상에, 꽃하고 잎이 만나지를 못해. 그래서 서로를 평생 그리워만 한다나? 이 얼마나 궁상맞은 꽃이냐. 내 인생하고 아주 똑같아…….”
“또 내 얘긴 듣지도 않고 하고 싶은 말만 하지. 아, 엄마! 방에 들어가서 자! 아유, 술 냄새!”
연례행사다. 상사화가 만개할 때마다 엄마에게 끌려 영광에 오기를 벌써 사 년째. 엄마는 항상 저녁 무렵에 영광에 도착해서 술을 진탕 마시고는 다음날 몽롱한 상태로 불갑사에 갔다. 그리고 잎도 없이 새빨간 상사화 속에 파묻혀 기도를 했다. 혹시 엄마가 독실한 불교 신자라서 상사화가 만개한 것을 부처님 공으로 돌리는 거 아니냐고? 아니, 우리 엄마는 나만 믿는다. 신보다도 내가 더 낫단다. 하긴, 엄마는 살아생전 아빠도 믿지 않았다.
아빠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우리에게 믿음을 준 적이 없었다. 잠수 타다 빚만 안고 돌아오기를 수십 번. 그래도 엄마는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아빠의 빚을 갚았고, 마지막으로 빚 대신 병을 안고 돌아온 아빠를 임종직전까지 극진히 간호했다. 나는 평생 애정 없는 남자를 뒤치다꺼리하며 살아온 엄마가 가여워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가 흠모했던 다른 남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반갑기까지 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엄마에게도 엄마의 인생이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엄마, 남자친구 만들어도 돼. 이제 아빠도 없으니까 자유잖아. 결혼 직전까지 좋아하던 딴 남자 있다며? 나 신경 쓰여서 머뭇거리는 거야?”
“아냐. 그런 거. 그 사람 출가했으니까.”
엄마가 좋아하던 사람은 어느 절의 스님이 되었다고 했다. 출가 전날, 훌쩍이던 엄마에게 잎이 없는 상사화 한 송이를 주며 이승에서 흠모했던 걸로 만족하니 저승에서 보자고 했다나? 하여간 아빠가 돌아가신 다음해부터 엄마는 해마다 상사화를 보러 나섰다. 그 스님의 소식은 알 수 없으니, 스님 대신 상사화가 있는 절이라도 가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검색 끝에 영암의 ‘불갑사’가 상사화 최대 군락지라는 사실을 알아냈고, 엄마는 더 묻지도 않고 영암가는 차표를 샀다. 그리고 매년 9월, 나는 내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 없이 상사화 축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해마다 엄마의 간접 연애를 훔쳐보는 기분으로 말이지.
다음 날, 눈을 떠 보니 엄마가 먼저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아직 술 냄새도 가시지 않았는데, 의욕 충만한 모습이었다. 이국적인 모양의 불교 테마 공원을 지나 붉은 다리를 지나니, 붉은 꽃이 바다처럼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이뤄지지 못하는 인연에 반발하듯 붉게 타오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잎도 없이 홀로 화려하게 피어난 것을 보니 고고한 한편 처연하게 보이기도 했다.
엄마는 상사화가 살아있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귀하게 쓰다듬고, 곱게 보듬었다. 그리고는 화소 낮은 폴더 폰을 꺼내어 요리조리 다른 각도에서 사진을 쉼 없이 찍었다. 나는 예년처럼 그런 엄마에게서 조금 멀찍이 떨어져 꽁무니를 쫓아다닐 뿐이었다.
“소녀 같으시네요.”
정신없이 사진을 찍으시는 엄마에게 웬 사내가 말을 걸었다. 민머리에 승복을 입을 걸 보니 스님인 듯 했다. 엄마는 얼굴이 붉어졌다.
“예, 예? 환갑이 다 되어 가는데 소녀라니요…….”
“상사화 이야기에 나오는 소녀 같으세요. 스님에게 반해 속앓이 하다가 죽어 무덤에 상사화를 피웠다는 그 아가씨 말이에요.”
스님의 이야기에 엄마와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야말로 엄마의 이야기가 아닌가. 입을 쩍 벌린 엄마를 보며 스님이 말을 이었다.
“어떤 스님이 상사화 소녀가 오면 전해 달라 하셨어요. 그동안 고되게 사느라 고생 많았고, 남은 인생 자유롭게 살라고요. 그리고 앞으로도 상사화 철엔 꼭 불갑사를 찾아 달라 하셨습니다.”
엄마는 두 눈이 그렁그렁해진 채로 서 있었다. 나는 엄마의 뒷모습에서 처음으로 작은 소녀를 보았다. 붉게 일렁이는 상사화 사이에서 어느새 엄마도 꽃처럼 흐느끼며 일렁이고 있었다.
저녁때가 다가와 장 보러 나갈 준비를 하자 어린 아들이 또 마트에 가자고 성화였다.
“엄마는 마트 말고 시장 갈 거야. 같이 갈래?”
“싫어! 시장은 냄새난단 말이야!”
아이가 잔뜩 토라진 얼굴로 소리를 빽 질렀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었다. 내 오늘 저 녀석의 볼기짝을 때려 주리라 결심하고 뒤를 홱 돌아보았는데, 일곱 살 밖에 안 된 쪼끄만 게 눈치는 또 삼단이라 벌써 제 방으로 도망쳐버렸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아주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고,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내게 모든 애정을 쏟아 부으셨다. 최신 전자기기를 반에서 가장 먼저 갖게 되는 것도 언제나 나였고, 가정부 아주머니가 말끔히 다려 준 교복을 입고 등교했으며, 방과 후 교문 앞에는 항상 나를 데리러 온 기사 아저씨가 있었다. 친구들은 모두 나를 부러워했고, 내 환심을 사려 노력했다. 남들에게 없는 것도 다 있었고, 갖고 싶은 것이라면 언제든지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영화 속의 여주인공처럼 나날이 콧대가 높아져만 갔다.
어느 날은 교문 앞에 나를 데리러 온 기사 아저씨가 없었다. 한 시간을 기다려도, 두 시간을 기다려도 아무도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 아버지께 이 일을 다 일러바쳐서 혼쭐이 나게 해 주리라고 벼르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 안이 소란스러웠다.
“영희야, 넌 안에 들어가 있어라.”
한 번도 내게 엄한 얼굴을 보인 적이 없던 아버지였는데, 표정이 여간 심각한 게 아니었다. 문에 귀를 바짝 대고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엿들었다. 아버지의 친구에게 명의를 빌려 준 일이 있는데, 모르는 새에 아버지 앞으로 빚이 엄청나게 쌓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가게를 팔고 새로 사업을 시작하겠다며, 나를 할머니께 맡기고 어딘가로 떠나셨다.
갑작스레 시골로 전학을 가게 된 것은 불만이었지만, 전에 사 두었던 워크맨 같은 것들이나 외국에 다녀온 이야기들로 쉽게 새 친구들의 환심을 살 수 있었다. 나는 빠르게 새 학교에 적응할 수 있었고, 학교에서는 모두들 나를 부잣집 딸로 알게 된 것이다. 집에 돌아오면 고기반찬이 하나도 없는 밥상 앞에 앉을지라도, 학교에서만은 여전히 내가 공주님이었다.
그런데 그런 내게 큰 약점이 하나 생겼다. 바로 할머니가 나물 장수라는 사실이었다. 할머니는 나를 맡아 키우시게 된 이후로 밤낮 없이 나물을 캐러 다니셨다. 나는 그런 할머니가 싫었다. 이제는 할머니가 매일같이 내 교복을 다려주셨지만, 우리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보다도 낡은 옷을 입은 할머니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하교하던 나는 저 만치 멀리 길바닥에 앉아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발견했다.
“우리 강아지, 지금 끝난 거여?”
할머니는 내게 반갑게 손을 흔드셨지만, 나는 친구들 앞에서 ‘이상한 할머니네.’하고 시치미를 뗐다. 할머니는 내가 보낸 경멸의 시선을 빠르게 알아차리셨고, 내가 그 앞을 지날 때에는 아예 고개를 푹 숙이고 계셨다.
이 년이 지나고, 어느 정도 가세가 회복되어 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까지 나는 한 번도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나물을 다 팔고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신 할머니는 항상 웃는 얼굴로 내게 저녁상을 차려 주셨다. ‘우리 강아지, 배고팠지?’하시면서 말이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있는데, 내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나는 대학교에 들어가서야 내 철없던 행동들을 반성했지만,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걷다 보니 어느 새 시장 입구였다. 간판까지 내 걸고 깔끔하게 새 단장을 마쳤지만, 거기에 서 계시는 노인들의 모습은 옛날과 다름이 없었다.
“아이고, 오늘도 나오셨네. 봐봐. 오늘은 고사리가 아주 싱싱해.”
허물없이 건네는 인사들과 웃음이 오갔다. 나는 이 반듯한 신식 시장과 그 안에서 어우러져 피어나는 구수한 웃음들을 보며, 새침데기 고등학생이던 나와 우리 할머니를 떠올린다. 그 때 웃으며 할머니께 인사를 드릴 수 있었더라면, 할머니와의 추억이 몇 갑절은 많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우리 동네에는 더 많은 마트가 들어서겠지만, 나는 그 때에도 골목을 누비며 시장을 찾아 낼 것이다. 그리고 그 귀퉁이 어딘가에서, 또 어느 할머니에게 나물 한 봉지를 사야지. 그런 생각들을 했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건물을 높이 올려다보려니 핑하고 현기증이 났다. 퇴근 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리에는 행인이 많았다. 지수는 선배가 소개해 준 도자공방을 찾는 중이었다. 공방 이름과 간단한 약도가 적힌 메모지를 들여다보다가 비슷비슷하게 생긴 건물을 한번 더 올려다보았다. 아까부터 고약한 냄새를 풍기던 은행나무에 손을 짚고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대었다. 여기가 아닌가 싶을 때 지수의 눈에 들어온 자그마한 공방 하나.
지수는 회사에서 맡게 된 ‘우리 고장 바로 알기’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내야 했다. 입사 후 처음으로 맡은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지수는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다. 도자기라니 말만 들어도 지루하고 따분했다. 지수는 학창시절 여학생들 사이에서 한창 유행한 십자수니 비즈공예니 하는 것들에 눈길 한번 준 적이 없었다.
또각거리는 신발을 다시 한 번 고쳐 신은 지수는 자그마한 공방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널찍한 실내에는 갖가지 도자기와 사기그릇, 앙증맞은 실내 인테리어 장식품까지 단정하게 놓여있었다. 문에 걸린 종이 딸랑거리자 상냥하고 단정해 보이는 여자가 나왔다.
어서 오라는 여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자기 만드는 법 좀 배우러 왔다며 용건을 말했다. 지수의 급한 성격이 여기에서 나왔다. 여자는 친절히 지수를 안내했다.
지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조심스럽게 흙을 만졌다. 반죽된 흙을 쓰다듬듯이 만지는 지수를 보고 여자는 주물러 보라고 했다. 지수가 공들여 받은 네일아트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쉬워 보였던 물레를 돌리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정신집중을 하지 않으면 금세 틀에서 벗어나기 일쑤였다.
‘하아, 따분해.’
지수의 속마음이라도 들리는 걸까 여자는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대꾸했다.
“많이 따분하죠? 처음 하시는 분들은 다들 그러시더라고요. 영화나 텔레비전으로는 쉬워 보이죠. 그런데 정신 집중 안 하면 틀 하나 잡는 것도 어려운 게 바로 도자기에요.”
지수는 정신을 집중했다. 손의 감촉을 느끼고 흙이 전해주는 소리와 느낌에 신경을 기울였다. 질척거리지만 부드러운 그 촉감을 손끝 감각으로만 느끼려 했다.
‘아, 살아있는 것 같아.’
지수가 빙긋 웃자 여자도 따라 웃었다.
오늘은 첫날이니 흙의 감촉을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자가 말했다. 특별할 것 없다고 그저 프로젝트만 잘하면 그뿐이라고 여겼던 지수에겐 적잖이 놀라운 일이었다.
지수는 공방에 들어올 때 보았던 사기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투박했다.
다음날도 그 다음 날도 지수는 틈틈이 공방에 들렀다. 지수는 가만히 도자에 손을 대보았다. 가마에서 갓 나온 도자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따뜻함이 남아있었다. 흙의 기운일까 만든 이의 기운일까, 도자기는 여전히 투박했지만 따뜻했다.
조용하고 단순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진중함과 무게감이 좋았다. 옛것이지만 촌스럽거나 싱겁지 않음을. 단순하지만 그 속에 묻어있는 화려함이 좋았다.
“지수씨, 뭔가 바뀐 것 같은데. 머리했어?”
회사선배가 지수 옆을 스치며 툭 던지듯 말했다.
“아니요? 딱히 바꾼 건 없는데…….”
지수는 말끝을 흐렸으나 달라진 것이 무언지 내심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제가 공방에서의 마지막 날이었고 공방 여자와 대화를 나눈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이다.
“지수씨 제법 실력이 늘었어요. 성격도 많이 차분해진 것 같고.”
“그래요? 호호. 제가 원래 성격 급하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웠는데, 여기 다니면서 많이 차분해 진 것 같긴 해요. 흙 만지는 것도 그렇고 물레 돌리는 것도 그렇고. 물레를 돌릴 때면 잡생각이 싹 사라지니까요.”
“선물이에요. 그때 한참 바라보고 있길래.”
여자는 지수에게 작고 아담한 사기그릇 세트였다. 사기그릇을 바라보느라 지수는 고맙다는 말도 잊었다. 손을 대어보았다. 여전히 투박하지만 따뜻했다.
오늘도 입단속 철저히 하거라.
상궁마마님의 낮고 지엄한 목소리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이곳은 말 한마디도 새어나갈 수 없는 지밀이다. 나는 지밀나인 중 하나로 나이가 가장 어리다.
문과 문 사이를 두고 나오는 말소리. 상궁마마님들이 하는 이야기. 왕후와 상궁이 나누는 이야기. 그리고 생과방이나 소주방에서 새어나오는 잡다한 이야기 등이 떠도는 곳, 비밀이 만들어지나 절대 새어나가지 못하는 곳 중 하나가 된 곳이다.
“월이 너 그 이야기 들었니?”
“또 무슨 이야기? 도대체 이런 이야기들은 어떻게 떠도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전하께서 궐에 이야기꾼이라도 들였단 거냐?”
“쉿, 마마님께서 입조심 하란 말 못 들었어? 전하라는 단어도 입에 함부로 올리지 못 하는거 모르니?”
“답답해서 그래. 답답해서.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는 많은데 도무지 말할 곳이 없잖아. 그나저나 아까 하려던 이야기는 무어냐?”
“아, 그게. 전하께서 사모하는 여인이 있는데 그 여인을 위해 매일 밤 가야금을 탄다고 하더구나.”
“뭐? 중전마마 말고 사모하는 여인이 따로 있다고?”
“쉿, 목소리 좀 낮춰. 네 덕에 제 명에 못 죽겠다. 왜 가락국에서 온 악성 우륵이라는 자 있지? 그 자가 가야금을 잘 탄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그 자를 통해 노래를 전한다나 뭐라나.”
“게 거기서 무엇을 속닥거리는 것이냐?”
참모의 불호령이었다.
“아 아닙니다. 그저 잡언이었습니다.”
“입 함부로 놀렸다가는 다들 알지? 쓸데없는 말 흘리지 말고 일이나 해야 할게야.”
가야금이라. 우륵이라는 자를 통해 노래를 띠운다. 전하께서 꽤나 로맨틱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가야금에서 참으로 기묘한 소리가 난다고 생각했다. 그저 기교가 좋아서가 아니었다. 튕기고 뜯는 그 음정 하나하나에 무언가 있었어.
드르륵 문이 열렸다. 지밀나인 두 명과 김상궁과 조내관만이 동행하여 우륵을 만나러 간다는 명이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전에 생과방에서 나눈 이야기 때문이었다.
입을 함부로 놀릴 수 없었던 월야는 입을 꾹 다물고 김상궁의 뒤만 바짝 쫒았다.
구슬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하께서는 꽤나 흡족한 미소를 보였다. 눈을 감으시고는 구슬픈 가락에 귀를 기울였다. 흐음 하고 전하의 입에서는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우륵이라는 자가 전하의 심정을 너무 잘 꾀고 있었던 것일까. 노랫가락에 온 신경을 쏟느라 숨 한 번 크게 쉴 수 없었고 침도 함부로 삼킬 수가 없었다. 고개를 빳빳이 들 수도 없었기 때문에 좀 더 가락에 집중할 수 있었다.
확실히 궐 안에 있는 악사들과는 다른 음색이었다. 무언가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오전에 생과방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거짓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여인을 위해 올리는 곡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 하마터면 감탄사를 입 밖으로 내뱉을 뻔했다.
처소로 돌아온 뒤 날이 밝고 나인들 몇 명이 소주방에 모여 있었다.
“얘, 너 어제 우륵이라는 자의 가야금 가락 들었다며? 어때? 정말 전하께서 여인을 위해 띄우는 가락이더냐?”
“글쎄요. 저는 모릅니다. 그저 가락만 들은 것이었지요.”
“얘가, 자세히 좀 말해봐.”
“정말이어요. 가락이 구슬프고 또 구슬펐지요. 그것이 여인을 위함인지 나라를 위함인지는 모르겠어요.”
“아이 재미없어. 됐다 얘, 가봐.”
언젠가 전하의 용안을 뵙는 날. 전하의 마음이 잘 전달되었을 것이라 말씀드려야 겠다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