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영문인지 아침부터 밖은 소란스러웠다. 웅성거리는 곳에서 드문드문 들리는 이야기를 조합해보니 오늘 하루 동안 정전일거라는 이야기였다. 암막커튼을 달아놓아 방안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어두웠다. 불면증이 심한 내가 고안해 낸 최선의 방법 중 하나였다. 아무런 빛이 새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 느지막이 일어나 밖으로 나가보니 오후 2시 반이다. 밖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소식이 있다고 하더니 밖은 아직 어둠이 내려앉을 시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컴컴했다.
“정전이면 텔레비전도 다 안 나오는 건가?”
나는 조그맣게 혼잣말을 읊조렸다. 부스스하게 일어났을 때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전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별다를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일단은 무의식적으로 리모컨을 집어 들었으나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웅성거리며 켜져야 할 텔레비전은 켜질리 만무했다. 아차, 싶은 마음에 부엌으로 갔다. 뭐라도 먹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즉석밥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물론 이 고철덩어리도 반응할리 없었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선반에 놓인 수분이 날아간 식빵 한 조각을 입에 구겨 넣었다. 아직 어두운 밤이 오지 않았음에도 정전은 쉽게 적응되지 않았다. 마치 어두운 동굴 안에서 원시생활을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여겨졌다. 문명과 닿아있는 유일한 끈, 휴대전화의 전원을 켜보니 배터리도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빈집에 불빛도 없이 소파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으려니 나 자신이 무기력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문득 빛이 보고 싶어졌다. 베란다 창고에 가서 촛불이라도 찾아볼 요량으로 자신 있게 팔을 걷어붙이고 창고에 발을 들였으나 어두운 곳에서 촛불하나 찾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와당탕하고 아슬아슬하게 얹어놓은 살림살이들이 머리위로 쏟아져 내렸고 촛불을 찾기는커녕 천둥소리에 놀라 후다닥 거실로 뛰어 들어왔다. 조명이 없다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덩그러니 소파에 앉아있는데 성냥팔이 소녀 이야기가 떠올랐다. 성냥하나 켜면 맛있는 음식들이 떠오르고 또 하나의 성냥을 켜니 따뜻한 방안이 떠오르고 마지막 하나의 성냥을 켜며 잠이 들었다지. 성냥팔이 소녀에게도 있던 성냥이 나에게는 없다. 고로 빛을 찾아 나서야 했다.
우산 하나만 챙겨 나온 밖엔 비가 그쳐있었다. 비는 그쳤지만 어둠은 그대로였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 채 거리로 나섰다. 거리는 휘황찬란했다. 여러 간판과 가게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들로 눈이 부셨다. 불과 몇 시간동안 빛을 못 본 것뿐인데 빛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토끼눈을 떴다.
문득 친구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올해 크리스마스에 남자친구가 생긴다면 꼭 가보고 싶다던 곳이 있다고. 필룩스 조명 박물관에서 크리스마스 특별전을 열었다고 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조명 조형물이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했다. 망설일 필요가 없다. 필룩스 조명 박물관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입장 한 시간 전에 도착하여 나름 여유 있게 박물관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곳은 거리에서 본 찬란한 조명과는 다른 느낌의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을 풍겼다. 아기자기한 조형물을 비롯하여 빛이 없던 시대의 이야기부터 현대의 조명 그러니까 일상생활 속 조명의 역할 등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찬찬히 둘러보면서 낮에 있었던 정전사태를 떠올렸다.
빛은 있어야 했다. 애써 어둠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어둠이 짙게 깔리면 깔리는 대로 어둠을 놔두면 되고 날이 밝아오면 밝는 대로 밝음을 즐기면 그만이었다.
빛을 받은 조형물들은 아름다웠다. 친구가 말한 대로 크리스마스에 왔더라면 더 아름다웠을 텐데, 하는 아쉬움까지 들었다. 폐장시간이 다 됐는지 드문드문 관람을 하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니 집안은 그리고 내 방안은 여전이 어두웠다. 나는 내 방안에 쳐있던 암막커튼을 확 걷었다. 어두웠던 집안이 한층 밝아진 듯 했다. 마치 은은한 조명을 하나 켠 것처럼. 그리고 조그맣게 혼잣말을 했다.
‘오늘 하루는 꿈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라!’
그곳이 어디든 산을 오르는 것이 미연은 영 못마땅하다. 서울의 많고 많은 곳 중에 산이라니. 미연은 혀를 끌끌 찼다.
“너도 참 너다. 이 넓은 서울에 갈 곳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동네 산이니?”
“왜, 좋잖아. 자 공기한번 쭉 마셔봐. 이렇게 맑은 공기를 돈 안내고 마시는 걸 감사해야해. 그리고 멀리 가지 않고 등산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좋아!”
“웃겨. 너랑 주말을 보낸다고 온 내가 바보다.”
미연은 투덜거리면서도 연수의 뒤를 곧잘 쫒아온다. 리본 끈으로 길을 안내하는 곳곳에는 이야기가 있는 관악산 둘레길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아, 힘들어. 원래 이렇게 힘든 코스였어? 동네산이 뭐 이래?”
“여기만 넘어가면 내리막길이야. 조금만 힘내. 너 다이어트 한다며, 한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지방 타는 소리가 들리지~ 안 들려?”
“놀리냐, 힘들어 죽겠구만. 물이나 좀 줘봐.”
관악산 둘레길 제2구간은 물과 바람 공기가 참 시원했다. 작고 아담한 계곡을 지나면 장승과 솟대가 등산객을 반긴다. 한여름이면 여름의 냄새가 나고 가을이면 또 가을의 냄새가 나는 곳이다. 흙길을 걷다보면 오르막길 내리막길이 번갈아가며 나왔다. 오르막을 오르다 지칠 즈음이면 내리막길이 나와 쉼을 주었고 땀이 식을 만하면 다시 오르막길이 나왔다. 작은 들꽃은 휴식을 함께 기뻐해주기라도 하듯 아담하게 피어있다.
희진은 미연이 올라올 수 있도록 보폭을 맞춰주었다. 그리고 뒤에서 미연의 등을 살짝 떠밀어주기도 하며 미연의 힘을 나누고자했다.
“어! 다람쥐다. 여기 다람쥐가 다 있네.”
“그러게, 귀엽다.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소풍 온 어린애들 같아.”
“소풍? 소풍이라면 소풍이지. 점심으로 김밥도 싸왔으니까, 제대 론데?”
미연과 희진은 마주보고 웃었다.
관악산 제2구간은 돌산 조망점에 올라 서울시내를 바라 볼 수 있으며 인근 호수공원도 둘러볼 수 있는 코스라고 했다. 미연과 희진도 곧 돌산 조망점 지점에 도착하였다. 한숨 돌리고 큰 바위에 털썩하고 주저앉으니 서울시내가 한눈에 다 담겼다. 이곳이 정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는 것이 신기했다. 뭉친 다리근육을 털고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 오이를 꺼냈다.
“경치는 좋네.”
“거봐, 따라오길 잘했지? 땀 흘리고 먹으니까 더 맛있는 것 같다. 그치?”
“이래서 사람들이 산을 오르는 걸까?”
“무슨 소리야?”
“아니, 그냥. 턱 끝까지 숨이 차고 다리가 후들거려도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걸 느끼고 자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공기가 좋아서 오는 사람도 있고, 바람을 좀 더 많이 느끼고 싶을 수도, 그냥 산이라는 것 자체가 좋아서 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이야기가 있는 둘레길은 친구와, 가족과 연인 등 사랑하는 사람과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각자의 산을 오르는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산이 주는 행복과 시원함은 각자의 추억대로 되가져갈 것이다.
누군가 산다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오르막길 내리막길이 있다고 했다. 흙길로 걷기도 했다가 딱딱한 아스팔트를 걷기도 하며 계단을 오르기도 하고 평지를 걷다 내리막길을 만나기도 한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그곳에 바람도 있고 물도 있고 나무도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구간까지 정복하고 나니 석수역이다. 꽤나 긴 코스를 마치고 내려오니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꽤나 알찬 주말을 보낸 것 같은 뿌듯함과 쾌감이 밀려오는 순간이었다. 그저 그런 주말이었다면 집에서 밀린 잠을 잔다거나 텔레비전이나 붙잡고 있었을 것이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50분.
“드디어 도착. 음, 막걸리에 파전 어때?”
“좋지!”
어느새 ‘강남’이라는 행정자치구 자체가 하나의 문화가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강남을 외쳤고 그 외침 하나로 강남이라는 지역 일대에 파란이 일었다. 땅값은 물론 그곳에서 피어난 문화, 패션, 거리 하나까지 그 시대의 트렌드를 이끄는 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강남스타일이라는 대중가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도대체 ‘강남스타일’이 무엇이기에 사람들은 그것에 열광을 하는 것일까 생각한 적이 있다.
언젠가 강남이라는 단어는 부의 상징이었고 무너져가는 아파트라도 강남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훈장처럼 달리는 명예였다. 소위 잘산다는 사람들의 동네로 불리는 강남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워너비 동네로 자리 잡고 있다.
“너 장래 희망에다 뭐 썼어?”
“난 청담동 며느리.”
“청담동 며느리가 되는 것이 꿈이야?”
“그럼, 좋은 집안에 시집가서 남편 잘 만나 행복하게 사는 것만큼 좋은 게 어디 있니?”
민지는 청담동 며느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민지 말대로 좋은 집안에 시집가서 행복하게 사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겠지만 그것이 곧 행복이고 꿈이라는 건 조금은 슬픈 일이었다.
드라마에서 재벌집들이 전화를 받으면 동네 이름을 말하며 전화를 받는 것처럼. 민지도 콧소리를 흘리며 ‘청담동입니다’라고 할 것이다.
민지는 항상 만날 약속장소를 말하면 강남역 7번 출구였다. 그래서 친구들은 민지를 강남역 7번 출구라고 부르기도 했다. 금요일이면 강남역은 젊은이들의 문화로 가득했고 만남과 만남으로 들떠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붕붕 울리는 음악과 현란한 사람들의 발소리가 늦은 시각임을 실감하지 못하게 했다. 민지의 헬스클럽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강남역 7번 출구로 나갔다.
민지는 운동으로 잘 다져진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것도 다 청담동 며느리가 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라고 하며 자랑스러워했다.
커피숍에 들어가도 민지는 아메리카노 이외에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나는 약간 비꼬는 목소리로 그것도 강남 스타일이냐? 라며 비웃었지만 민지는 눈 하나 끔뻑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도도한 목소리로 그렇게 달달한 거 자꾸 먹으면 ‘살쪄’라며 생크림 잔뜩 들어간 달달한 내 음료를 비난했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은 강남과 강북을 갈랐고 조망권과 교통권, 문화생활의 차이를 만들어갔고 그 차이를 통해 만족을 느끼려했다.
어쩌면 강남은 서울의 수도가 아닐까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뛰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 많은 스펙을 쌓으며 어떤 것을 이루려고 하는 것일까. 과연 서울에도 수도가 있다면 그곳은 강남일까.
여전히 강남역엔 사람들이 붐볐다. 압구정동이나 청담동에는 비슷한 차림새에 비슷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생각과 다른 사연들을 품고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나는 물끄러미 지나가는 행인들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돈이 많은 건 아닐 텐데. 비슷한 얼굴에 비슷한 차림을 하고 있지만 그들이 원하는 삶과 생각은 다를 텐데 말이다.
민지와 꽤 늦은 시간에 헤어졌다. 민지는 저들 틈으로 사라져갔다. 유유히. 민지는 금세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어 누가 누군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멀어져갔다.
순간 나는 길을 잃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내가 가야할 곳을 말해줄 것 같은 사람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나에게 ‘이쪽으로 가면 강남역이 나오고 저쪽으로 가면 청담으로 가는 길일 거예요. 저쪽은 삼성동이고요.’정도로 이야기 해주겠지.
겨우 길을 걸으면서 나는 민지를 떠올렸다. 우리는 민지를 선뜻 속물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사람들의 통념이 그렇듯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웬만하면 서울, 그 중에서도 강남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더 많은 사람들의 장래희망이 혹은 꿈이 ‘도곡동 고급아파트, 삼성동 유명백화점, 청담동 며느리’가 되지 않기를 바랄뿐이었다.
반만년의 무게를 담고 오랜 세월의 흐름은 무상한 듯 고요히 흐르는 푸른 한강 위에 돛단배가 유유히 흐른다. 노를 젓는 사공도 없이 뉘엿뉘엿 흘러가는 강물 따라 흘러내려 간다. 저 멀리 보이는 포구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웅성웅성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푸른 한강에서는 한가롭게 물고기들이 헤엄을 치고 있다. 강나루에는 신록이 짙어져 버드나무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아차산의 푸름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나는 아차산에 올라 광나루를 내려다본다. 언젠가는 이란 경치를 벗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작은 텃밭에서 상추, 고추, 가지 등을 가꾸면서 낚싯대 하나 등에 메고 패랭이 하나 쓰고 그저 느긋하게 낚시를 즐기고 싶다. 광나루에 앉아 낚시 던져놓고 그저 여유롭게 낮잠이나 자는 삶이 얼마나 한가하지만 여유로울까.
나는 현재의 최고 명문가인 안동 김씨의 후원을 받고 있다. 나는 그를 위해 그의 집인 청풍계(淸風溪)를 여러 번 그려줬다. 내가 그린 청풍계 그림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사람들은 신선의 솜씨라며 나를 칭송한다. 여기에 성상께서도 나를 후원해 주고 계신다. 나는 성상을 세제(世弟) 시절부터 그림 스승이었을 정도다. 하지만 나의 예술혼은 채워지지 않는다.
수십 년 전 우연한 기회에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직접 볼 기회가 있었다. 당시 그림을 본 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어찌 이런 그림을 단 3일 만에 그릴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사람의 솜씨가 아니다.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자신이 사는 곳을 그려냈구나.”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마음을 뺏기고 어찌하면 나 역시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수없이 고민하고 수없이 그리기를 수십 년. 수백 장의 화선지에 검은 묵과 종이의 여백을 살려 수없이 그리고 찢기를 반복하고 있다.
내가 이곳 광나루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아차산과 한강이 어우러지는 아리따운 경치와 함께 이곳은 권문세가들의 별장이 있어 자연과 인간의 건축물이 잘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더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모습과 우리의 시대를 한 폭의 그림에 그리고 싶다. 마치 신선이 사는 몽유도원도처럼...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그리고 내가 사는 현재를 그리고 싶을 뿐이다. 아차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나루터에 묶인 두어 척 나룻배와 한강을 가로질러 쉴 새 없이 다니는 돛단배, 그리고 그 안에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선비들이 가득 타고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풍류를 즐기고 있다. 나는 그리고 싶다. 우리가 사는 이곳을 신선이 노니는 곳처럼 말이다.
그렇게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해 나는 전통적 수묵화법이나 채색화를 나 나름대로 해석해 나만의 필묵법을 개발했다. 세간 사람들은 수많은 그림을 그렸고 내 그림을 보고 따라 그리는 선비나 직업 화가들이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겸재파 화법이라 부른다고 한다.
나는 이제 나만의 화법으로 '광진'을 그리고 있다. 광진은 도성 안에서 살곶이다리를 거쳐 광진길을 따라 이르게 되는 강나루로, 여기서 배를 타야 강 건너 삼전도로 갈 수 있다. 이상향의 존재하지 않는 산수를 그리는 것이 아닌 실제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산수를 하나의 붓으로 백색 화폭에 담아 꿈을 꾸는 것 같은 환상을 자아내고 싶을 뿐이다. 그것의 나의 ‘광진’인 것이다.
어머니는 시장에 갈 때면 줄곧 나를 데리고 가셨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사람구경 많이 해보겠노 하면서 고사리 손을 꼭 잡고 시장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주셨다. 작은 아이의 눈에 비친 시장은 없는 것 없는 만물상자 같았다. 엄마는 시장에 오시면 항상 마늘 한 접을 사셨다. 요즘 마트에는 깐 마늘이며 다진 마늘이며 편하게 나온 것들이 많은데 엄마는 항상 흙 묻고 주렁주렁 매달린 통 마늘을 사오셨다.
집에 오면 신문지 하나 깔고 구부정한 자세로 마늘을 까셨다. 그러면서 매우신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는 엄마에게 슬퍼서 우는 것이냐고 물은 적이 있고 엄마는 아니라고 했다. 그냥 눈이 매워서 그런 것뿐이라고 했다. 엄마의 구부정한 등허리가 흐느낌에 들썩였다.
엄마의 시집살이는 마늘만큼이나 매웠다. 아빠는 엄마와 할머니 사이를 방관하였고 할머니는 그런 엄마를 쥐 잡듯이 잡았다. 엄마는 할머니가 이러는 것이 할아버지 때문이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져 계셨기 때문이다. 중풍으로 쓰러지신 것이 엄마 때문도 아니었는데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쓰러지신 이후로 엄마를 못살게 굴었다. 할아버지가 쓰러지시는 바람에 할아버지 뒤치다꺼리까지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엄마를 더욱 못살게 굴었다.
서슬이 퍼런 눈매로 엄마의 일거수일투족을 따지고 들었고 서방 기 빨아먹는 것이라며 욕도 서슴지 않았다. 그럴 때면 나는 쪽방 구석에서 귀를 막고 있었다. 엄마는 할머니에게 한 소리를 듣고 나면 나에게 시장에 가자고 했다. 시장에서 엄마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손을 꼭 잡으면 엄마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시장을 한 바퀴 돌고도 살 것이 마땅치 않으며 한 바퀴를 더 돌곤 했다. 애호박과 마늘, 부추를 사고 난 뒤 마지막으로 마늘 한 접을 또 샀다.
엄마는 주방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마늘을 깠다. 하나 두 개를 까다보니 또 눈이 매운 모양이었다. 엄마의 구부정한 등이 들썩거렸기 때문이다. 나는 마늘이 엄마를 괴롭히는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동그마니 몸을 말고 앉아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마늘 깔 때마다 울면서 왜 시장갈 때마다 마늘을 사?”
“마늘이 몸에 좋으니까 그렇지.”
“마늘이 몸에 좋아? 그렇지만 너무 맵잖아.”
“매우니까 먹는 거야. 매우니까.”
엄마는 대답을 하면서도 훌쩍거렸다. 눈물과 콧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제 곧 외출했던 할머니가 오실 시간이기 때문에 엄마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내가 도와주겠다고 해도 엄마는 ‘아서’라는 말을 하며 만지지 못하게 했다. 나는 마늘을 까도 맵지 않았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할머니가 들어오셨다. 마늘 정리를 하고 있는 엄마를 곁눈질로 힐끔 보시더니 ‘뭐하려고 맨날 마늘이고.’라고 중얼거리며 쿵 하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엄마는 할머니가 중얼거리는 소리도 놓치지 않고 ‘의성마늘이 매콤한 게 혈액순환에 좋다고 하잖아요, 풍에도 좋지 않을까 해서.’라고 대답을 했으나 이미 할머니가 방문을 있는 힘껏 닫고 들어간 후였다. 나는 할머니가 들어간 방문이라도 흘겨보았다. 언젠가 할머니에게 엄마를 왜 이렇게 미워하냐고 물으려다가 그럼 못쓴다고 엄마에게 호되게 혼이 난 적이 있어서 그러지는 못했다.
엄마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엄마에게 마늘은 ‘매움’ 그 자체였나 보다. 엄마의 굽은 등허리가 들썩거릴 때마다 마늘은 더욱 매워졌는지도 모른다.
딸아이가 또 무릎이 다 까져서 왔습니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그랬는지 빨갛게 살갗이 찢어져서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들어옵니다. 흐르는 물에 상처를 씻어주고 바람을 호호 불어주었지요. 아이는 금세 울음을 그치고 다시 생기를 되찾습니다.
어릴 적 넘어져 무릎이 다치거나 상처가 나면 우리엄마도 반창고를 붙여주지 않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저 깨끗한 물에 씻고 소독을 하여 바람을 쐬어주는 것이 제일이라고 하셨지요. 여섯 살에 나는 우리 엄마가 계모인가 생각한 적이 있답니다. 나도 친구들처럼 예쁜 곰돌이 반창고를 붙이고 싶었는데 엄마는 상처가 덧난다며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소독약을 발라주고 따가울까 봐 호호 불어주는 모습을 보고 우리 엄마로 확신을 하긴 했지만요.
사실 상처가 난 곳에 물이 닿고 소독약이 닿으면 따갑기 때문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인데 엄마는 그것도 모르나 보다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물에 씻어 치료하는 것은 할머니 때부터 엄마까지 쭉 이어져 내려온 치료법으로 다 이유가 있다고 했지요.
옛날 신라와 백제가 전쟁 할 당시 싸움에서 크게 다친 아들의 약을 애타게 찾던 어머니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백설이 온 땅을 뒤덮은 곳에 날개를 다친 학 한 마리가 눈이 녹은 물웅덩이에 날개를 적셔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것을 보고 아들의 상처를 물에 담그게 하여 치료하였다는 전설이 있다고 말이지요. 엄마는 옛말 그른 것 하나 없다고 했지만 나는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들은 체 만 체하였답니다.
엄마는 할머니와 동네에 아주 오래된 온천에 자주 가셨습니다. 전설이야기도 여기에서 들은 이야기이지요. 동네에 으리으리하게 세워진 좋은 찜질방들도 많은데 엄마랑 할머니는 꼭 유성온천으로 가셨답니다. 특히 몸이 여기저기 쑤신다거나 마음에 근심이 쌓이면 어김없이 온천을 찾으셨지요. 한참을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다 먼저 나가겠다고 투정을 부리면 엄마는 온천을 하고 나면 몸이 개운해지는 것처럼 마음도 개운해진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마음에 근심이 물에 씻겨 내려간다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시험이 끝나는 날이면 친구들이랑 놀기보단 엄마랑 온천에 가는 일이 더 잦았습니다. 엄마는 꼭 수고했다고 온천에 가 그동안의 몸 고생, 마음고생을 다 씻겨 보내라고 하셨지요.
지금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보니 엄마가 더 그립습니다. 엄마와 마지막으로 온천에 갔던 날이 떠오릅니다. 엄마는 내 손을 꼭 잡으시고는 말씀하셨다.
"그저, 몸이나 마음이나 같은 법이다. 상처가 덧날까 꽁꽁 싸매고 있으면 그 속이 더 곪아 터지는 법이지."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셨지요.
어렸을 때 나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뜨거운 물에 몸을 숨이 턱턱 막히는데 왜 그렇게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지. 그런데 지금 이렇게 엄마를 그리워하며 내 딸아이의 손을 잡고 유성온천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엄마의 말에 일리가 있나 보다 생각이듭니다. 내가 지금 이곳에서 엄마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내 딸아이도 나를 기억할까요? 문득 엄마가 보고 싶어지는 날입니다.
어젯밤부터 내린 비가 그치고 이제 막 밝은 빛이 얼굴을 내미는 봄날입니다. 마당으로 민지가 작은 모종삽을 들고 나왔지요. 민지는 앞니 두 개가 빠진 개구쟁이 여덟 살입니다.
민지네 집은 경주에서도 아주 유명한 집이에요. 바로 민지의 할아버지 아니, 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쭉 경주에서 터를 잡고 대대로 경주에서 살아왔기 때문이지요. 민지네 할아버지는 경주의 토박이로 터줏대감 할아버지로 불리고 계시지요.
어쩐 일인지 민지는 아침부터 소란입니다. 마당에서 이리저리 삽을 들고 아빠를 재촉하지요. 오늘은 아빠와 작은 귤나무를 심기로 한 모양입니다. 어디에 심으면 좋을지 고민을 하던 민지는 작은 텃밭 옆에 한 곳을 가리켰지요. 민지와 아빠는 나무를 심기 위해 땅을 파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민지의 삽이 흙 속에 쑥 들어가자 덜거덕 하는 소리가 나더니 무엇인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민지는 조심스럽게 흙을 파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도자기 같은 물건이 땅속에 박혀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민지는 놀란 마음에 다급히 아빠를 불렀고 아빠는 조심스럽게 물건을 꺼내었습니다. 마당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자 민지의 할아버지가 마당에 나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마당에서 나온 청동으로 만든 접시를 살펴보았습니다. 심상치 않은 물건임을 감지하신 할아버지는 나라에 신고하셨고 민지네 집에 문화재 조사를 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민지는 어리둥절하여 아빠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어요. 아빠는 민지를 무릎에 앉혀두고 집 마당에서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민지야. 우리가 발견한 청동 접시 말이야. 저번에 민지도 가봤던 박물관 있지?
그곳에 전시될 거야. 그곳에 우리 집 주소도 적힐 것이고 발견자로 민지 이름도 적힐 거야. 어때? 신기하지?”
유물 그리고 문화재에 큰 관심이 없던 민지는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였지요. 그래서 그날로 아빠를 졸라 경주에 있는 세계문화유산과 문화재를 둘러보기로 하였습니다.
민지는 사실 경주가 신라 천 년 역사를 품고 있는 도시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수학여행도 서울에서 경주로 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었지요. 그런 민지가 아빠에게 먼저 경주에 있는 세계문화유산을 구경 가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민지는 먼저 별을 관측하였다는 신라인들의 과학지식이 엿보인 첨성대,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분황사를 지나 오릉까지 구경하며 스탬프를 찍고 신라 시대의 과학의 집결지인 불국사와 석굴암까지 둘러보았습니다.
그렇게 신라인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살아있는 천 년 역사의 고장 경주를 경험하고 온 민지는 그날 집에 도착하자마자 곯아떨어졌습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역사공부를 너무 열심히 한 탓에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잠든 민지는 꿈에 무엇을 보고 있을까요? 민지가 빙그레 웃습니다. 꿈에서 신라인이라도 만난 것일까요? 아니면 마당에서 발견한 유물이 박물관에 전시된 상황을 본 것일까요?
그동안 민지는 자신이 살고 있는 경주의 문화재와 역사에 대해 너무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너무 가까이 있어 소중한 의미를 알지 못한 것이었지요. 그런데 직접 유물을 발견하고 세계문화유산에 대해 깊이 느끼고 나니 자신이 경주에 살고 있는 것이 자랑스러웠고 뿌듯하게 느껴졌습니다. 잠든 민지가 한 번 더 빙그레 웃습니다.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는 내게 너는 놀아달라며 짓궂게 내 품에 파고든다. 읽던 책은 마저 읽고 나가자고 해보아도 이내 무릎을 베고 눕더니 무슨 내용을 읽느냐며 귀찮게 군다. 취미로 플로리스트 과정을 배우고 있던 차라 책을 고를 때에도 이런 장르로만 손이 간다.
꽃말에 관한 책을 읽고 있던 중이다. 꽃말이라고 하면 10대의 여린 감수성에 내게 맞는 꽃말은 어떤 것일까 찾아본 것 이외에는 없었다.
“음~ 장미라고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아마 빨간 장미가 아닐까 싶어! 빨간 장미는 사랑, 절정, 기쁨, 아름다움이고 하얀 장미는 순진, 존경, 순결이래. 노란 장미는 질투라네!”
“너는 질투가 많으니까 노란 장미가 딱 잘 어울리겠다.”
그러고 보니 너는 장미꽃 한번을 사준 적이 없다. 그 흔한 장미꽃 한 송이도.
“꽃꽂이 하면서 예쁜 꽃들도 많이 봤겠다. 그치? 그럼 넌 어떤 꽃이 제일 좋아?”
“글쎄. 꽃은 다 너무 예쁘고 각자가 가진 매력이 다 달라서. 근데 오늘은 장미!”
“오늘은 장미? 뭐가 그래. 그럼 내일은 또 다른 꽃으로 바뀐단 말이야?”
“그럴 수도 있지 뭘. 어차피 계절마다 피고 지는 꽃들도 다른데 사시사철 같은 꽃만 좋아하라는 법 있어? 오늘은 수요일이니까 빨간 장미!”알아들었을까? 이렇게까지 빨간 장미를 받고 싶다고 메시지를 보내는 데 못 알아 듣는다면 정말 미련 곰탱이라고 불러줄 것이다.
이야기가 금세 또 싫증이 났는지 내가 보고 있는 책을 뺏어가더니 나가자고 성화다. 나가면 어차피 밥, 커피, 영화. 영화, 밥, 커피의 반복일거면서 굳이 왜 나가서 시간을 보내야 하냐고 물으려다 그만 둔다.
“어디 갈 건데? 뭐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그래서 이렇게 보채는 거야?”
“그냥. 네가 가면 좋아할 만한 곳이 생각이 나서.”
남자친구의 손에 이끌려 온 곳은 풍암호수 수변공원이었다. 그곳은 때마침 장미축제가 한창이었다. 공원 곳곳을 아름답게 수놓은 장미꽃들의 지릿한 향기에 금세 매료되었다. 그곳에는 연인, 가족, 친구 등 다양한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더 다양한 종류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장미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문득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가 떠올랐다.
“여기 있는 장미를 다 모으면 백만 송이가 될까?”
“백만 송이? 글쎄. 감이 안 잡히네. 그런데 아니지 않을까? 수백만 송이면 그게 다 얼마야?”
백만 송이 장미의 노래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고 했다. 한 여자를 향한 구애의 도구로 전 재산을 털어 백만 송이 장미를 선물한 남자. 여자는 백만 송이 장미가 주는 아름다움만큼 황홀했을까?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포토존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생각에서 일까 포즈를 취해가며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 확실히 꽃이 예쁜 곳에는 사람이 많았고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차례가 돌아왔다.
색색 깔의 장미로 둘러싸인 터널 같은 곳에서 브이자를 그렸다.
천천히 장미꽃을 둘러보는데 장미의 종류가 이렇게 많았나 싶기도 하고 장미처럼 생기지 않은 장미꽃도 많았다. 프린세스 오브 모나코, 코사이, 람피온과 같이 이름들도 모두 귀족적이었다.
“이름들이 하나같이 다 멋있네. 마치 공주님 이름 같아.”
“그럼 얘한테도 예쁜 이름 하나 지어줘봐.”하며 빨간 장미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뭐야. 갑자기?”
“뭐긴, 네가 오늘은 빨간 장미가 좋다며. 그래서 준비한 거지. 얼른 이름이나 지어줘.”
“쳇, 둔감한 척 하더니만.”
그렇다면 이 장미의 이름은 빨간 장미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