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홍릉] 허울뿐이었던 황제, 고종, 국내여행, 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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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홍릉] 허울뿐이었던 황제, 고종


대한제국, 명성황후, 커피, 전기, 헤이그 특사⋯. 흔히 고종(高宗, 1852~1919년)하면 떠오르는 단어다. 부인 명성황후가 무참히 시해되는 것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던 것도 모자라 강제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며 나라를 빼앗기는 모습까지 지켜봐야 했던 그를 후대는 한심한 임금 혹은 동정해야 할 비운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명복(命福) 고종은 본래 왕권과는 거리가 멀었던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60년간의 세도정치로 찌들어버린 정국을 뒤바꾸려는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와 흥선대원군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죽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부인으로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올라 대비가 되었지만 안동 김씨 세도가문을 친정으로 둔 시어머니 순원왕후에 밀려 불운한 궁중 생활을 했던 신정왕후와 조금이라도 정치에 관심을 보였던 왕의 재목들은 무참히 제거하는 세도정치의 상황을 간파하고 부랑자 생활로 위장했던 흥선대원군은 ‘고종’이라는 카드로 대동단결한 것이었다. 
 

                    
                

즉위와 퇴위 모두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었다. 

고종은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신정왕후가 수렴청정하였고, 실질적 국정운영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맡았다. 즉위 10년 만인 1873년 친정을 선포한 고종은 의욕적인 국정운영을 진행하였다. 통상수교거부정책을 추진했던 흥선대원군과 달리 고종은 부인 명성황후와 함께 외교문물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고종은 1896년 아관파천 당시 처음 마신 것으로 전해진 커피 애호가였으며, 1887년에는 건청궁에 전기를 들여와 조선이 근대문물을 받아들였음을 대내외적으로 알렸다. 그의 서재로 쓰였던 집옥재는 중국식 벽돌 형식으로 지어졌으며, 집옥재 옆에는 자격루 대신 서양식 시계탑을 세우면서 고종은 근대문물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현했다.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강력한 나라를 만들고자 노력했던 고종.

명성황후 역시 근대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적극적이었으며,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맞서 적지 않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보통 왕이 어리거나 임금이 죽고 난 뒤 수렴청정을 했던 것에 반해 명성황후는 고종과 함께 일선에서 정국을 운영했던 인물이었다. 일제에게는 이러한 명성황후가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일제를 견제하기 위해 청과 러시아를 이용했던 그녀를 일본은 무참히 살해했다. 이것이 바로 한 나라의 왕비를 여우라 칭하며 작당 모의를 한 ‘을미사변’이다. 고종은 안전하다고 판단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아관파천(俄館播遷) 후 1년 만에 돌아온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했지만, 일제의 침략 의도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서구 열강으로부터 조선 지배권에 대한 암묵적 합의를 이끌어 냈다. 일제는 조선 내 친일파까지 내부 조직 요소에 심어놓은 상황 속에서 을사늑약을 통한 외교권 박탈을 시작으로 고종의 목을 서서히 조이기 시작했다. 
 

홍릉에 간다면 반드시 홍유릉 역사문화관도 가야할 것.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자 이준, 이상설, 이위종으로 구성된 특사를 파견했지만, 일제의 저지로 그들은 본회에서 제대로 된 발언조차 하지 못한 채 좌절을 맛봐야만 했다. 결국, 고종은 외교권이 박탈된 상태에서 일제의 승인 없이 특사를 파견했다는 이유로 군대 해산과 함께 강제로 퇴위되었다. 

왕위에 오르고, 물러나는 것 모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었던 고종은 재위 기간 일본의  명명백백한 침략의도를 눈으로 보고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인물이다. 1919년 1월, 고종은 67세의 그의 즉위 기간 왕권강화를 위해 재건한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트래블아이 왕릉 체크포인트]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한 홍릉(洪陵)에는 고종과 명성황후가 나란히 잠들어 있다. 고종이 황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능의 양식 또한 황제릉의 양식을 따랐으며 이는 명나라 태조 효릉을 본떠 조영한 것이다. 정자각 대신 침전이 들어서 있으며, 참도 역시 세부분으로 나눠져 있어 기존의 조선왕릉과는 크게 다른 모습이다. 홍살문 앞에서면 봉분을 둘러싸고 있어야할 문무인석을 비롯한 석물들이 참도의 양옆으로 마치 도열을 하고 있듯이 늘어서 있다. 홍살문 쪽부터 말, 낙타, 해태, 사자, 코끼리, 기린, 무석인, 문석인 순이다. 기존의 석물들에 비해 상당히 정교하고 사실감이 느껴지도록 조각되어 있다. 사실 궁이나 능에 있는 서수(瑞獸)나 석물은 그 모양새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동물과는 차이가 있어 쉽게 알아보기 힘들지만 홍릉(洪陵)과 함께 황제릉의 형식으로 조영된 순종의 유릉(裕陵)의 석물들은 누구나 쉽게 구분이 가능하다. 

안내판을 읽지 않고 무심코 들어서면 하나의 봉분에 혼유석(무덤 안의 혼이 나와서 놀도록 만들어 놓은 돌) 또한 하나여서 얼핏 고종만의 무덤으로 알고 지나칠 수 있으나 을미사변 이후 청량리에 묻혀있던 명성황후의 능을 옮겨와 예장(禮裝)한 합장릉이다.  넓은 능역에 위엄 있는 모습을 한 석물들이 무덤의 주인인 고종황제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지만, 일제의 간섭으로 허울뿐이었던 그였기에 왠지 어딘가 모르게 엉성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듯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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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5년 07월 17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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