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순릉] 언니를 따라 일찍 마감한 생애, 공혜왕후, 국내여행, 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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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순릉] 언니를 따라 일찍 마감한 생애, 공혜왕후


 예종 비 장순왕후와 함께 한명회의 딸로 1456년 태어난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1474년)는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의 부인으로 성종보다는 한 살 연상이다. 1469년 예종의 뒤를 이어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공혜왕후는 왕비에 책봉된다. 사실 예종에게는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으며, 성종의 형인 월산군도 있었지만 제안대군은 3살로 나이가 어리고, 월산군은 병약하여 성종이 왕위에 오르니 공혜왕후 또한 덩달아 왕비에 오른 것이다. 
 그녀 역시 아버지 한명회의 권력 유지를 위해 정략적 결혼을 하였고, 큰 다툼 없이 지아비는 왕위에 오르면서 순탄한 삶을 누릴 것으로 보였지만 그녀 또한 언니 장순왕후처럼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언니이자 시숙모인 장순왕후

  • 언니인 장순왕후처럼 공혜왕후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언니인 장순왕후처럼 공혜왕후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공혜왕후는 세조가 직접 뽑아서 성종의 배필로 삼게 하였으니 성종보다 한 살 많은 나이에 의젓함을 보이며 궁궐생활을 했던 그녀는 며느리들에게 엄격했던 시어머니의 교육에도 잘 따랐다고 한다. 공혜왕후는 성종과 후사를 얻지 못해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종이 들인 후궁에게 복식과 노리개 등을 끊임없이 내려주는 등 나이가 어렸음에도 이미 성인의 마음가짐이었다. 특히나 왕비로 책봉된 후에는 삼전(三殿) 정희왕후(세조 비), 소혜왕후(덕종 비), 안순왕후(예종 계비)를 극진한 효도로 받들고 매번 진기한 것을 구하여 맛있는 것을 받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궁궐 생활도 잠시, 그녀 역시 언니처럼 요절할 운명이었는지 병환으로 눕고 만다. 한명회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낳아서 다시 궁으로 돌아오는 등 병세에 따라 거처를 옮기다 결국, 1474년 음력 4월 언니 장순왕후와 마찬가지로 20세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한명회는 자신의 두 딸을 궁으로 들였다가 모두 일찍 떠나보내니 공혜왕후가 죽기 며칠 전부터 한명회가 아무것도 먹지 못하자 공혜왕후는 밥을 먹도록 명하고는 죽기 직전 “죽고 사는 데에는 천명이 있으니 영영 삼전(三殿)을 여의고 끝내 효도를 다하지 못하여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 하고 세상을 떠나니 마지막 순간까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젓함을 잃지 않았다.

그녀를 떠나보내는 실록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슬픔을 전하고 있었다.
천지가 조화되어 교통하매 만물이 모두 형통하고, 음양이 번갈아 운행하매 세공(歲功)이 이루어집니다. 후덕(后德)이 어진 데에서 왕화(王化)가 비롯되니, 하(夏)나라는 도산(塗山)에서 열렸고, 주(周)나라는 위사(渭涘)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늘이 성조(聖朝)를 돌보아 대대로 숙덕(淑德)이 있으니, 넓은 저 청원(淸原)에는 한씨(韓氏)가 큰 가문이었고, 대를 이어 미덕(美德)을 이루어 석원(碩媛)이 나셨습니다. 잠저(潛邸)에 들어와 빈(嬪)이 되어 오직 덕(德)을 행하시니, 내조(內助)가 매우 많아 대명(大命)이 돌아갔고 중궁[椒掖]에 올라서는 곤의(壼儀)를 능히 정제(整齊)하셨습니다. 천자(天子)가 아름답게 여겨 은총을 내리니, 고명(誥命)이 빛나고 곤의(袞依)에 문채가 있었습니다. 아랫사람에게 인애(仁愛)를 베풀고 세탁한 옷도 입어 검약(儉約)을 밝히시며, 밤낮으로 재계(齋戒)하고 명결(明潔)하여 종묘(宗廟)를 공경히 받드시매, 편히 지내려는 뜻을 나타내지 않고 예절을 지켜서 더욱 경건하셨습니다. 두터운 덕은 대지(大地)를 덮을 만하고 도(道)는 빛나서 하늘을 이을 만하며, 임금의 교화는 이남(二南) 보다 융성하고 국모(國母)의 모범은 일국(一國)에 나타나셨습니다. 장수를 누리고 다복(多福)을 받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 영위(榮衛)가 잠깐 어그러져 마침내 대점(大漸)이 다가와, 문득 황기(皇祇)는 자리를 잃고 이어 월어(月御)는 빛을 감추었습니다. 아아! 애통합니다. 아픔은 삼궁(三宮)에 사무치고 슬픔은 구중(九重)까지 얽혔으니, 울음은 육궁(六宮)에서 천둥소리를 이루고 눈물은 군신에게서 비오듯 합니다. 의범(懿範)을 우러르나 어디 가셨는지 영모(嬰慕)해도 좇을 수 없음을 개탄합니다. 아아! 애통합니다.
<성종실록 43권, 5년(1474년 6월 2일)>
 

[트래블아이 왕릉 체크포인트]
언니 장순왕후의 공릉(恭陵), 영조의 큰아들 추존왕 진종(효장세자)의 영릉(永陵)과 함께 파주삼릉에 있는 순릉(順陵)은 공릉처럼 단릉 형식이지만 순릉은 왕비의 능제로 조영되었기 때문에 공릉보다 석물이 많고, 12칸의 난간석이 둘러져 있다. 난간석에 작은 기둥은 태조의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을 본받았으며 혼유석(무덤 안의 혼이 나와 놀도록 만든 돌)을 받치고 있는 4개의 고석(鼓石)에는 나어두무(羅魚頭文)도 문종의 현릉 양식을 따랐다고 한다. 장명등은 8각형의 모습으로 역시 태조 건원릉의 장명등과 같은 모습이다.

ㄱ자로 꺾어진 공릉의 참도처럼 순릉의 참도 또한 특이한 점이 있다. 보통은 신로와 어로 두 개로 되어 있는 것에 반해 한 개의 참배로만 있는데 깔려진 돌의 상태로 보아 원형의 것은 아닌 것 같다. 위에서 절을 하는 배위석 또한 다른 조선왕릉의 것보다 투박하고 작은 것이 왠지 어색하다.

언니이자 시숙모인 장순왕후보다는 왕비의 삶을 오래 지냈고 능제 또한 왕릉으로 조영되었지만 일찍 삶을 마감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나마 파주삼릉 한 공간에서 영원토록 함께 지낼 수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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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유지를 위해 어린 두 딸을 정략결혼시킨 한명회는 행복했을까요?

트래블투데이 편집국

발행2015년 07월 17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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