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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기별미
소박하게 기억되는 인천 동구 먹거리 골목들
인천의 역사적 이미지를 떠올리자면 근대 문물의 교역로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항구가 있고 외국인 조계지가 형성되어 있는 만큼 외국의 문물이 인천을 관문삼아 지금의 서울로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 문화의 탐구지로만 인천을 기억하기는 아쉬운 부분이 있다. 1960년대 경제를 끌어올리기 위해 경공업단지들을 집중적으로 세우면서, 인천은 공장 노동자들이 활발하게 유입되는 도시가 되었다. 인천 동구에 있는 다양한 음식특화거리도 배고프고 주머니 가벼운 노동자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곳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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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기명물
책의 향수가 머무는 곳 – 배다리 역사문화마을
배다리 헌책방거리는 인천의 근현대사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 뒤 일본사람들에게서 쫓겨난 조선인들이 모여 마을을 이룬 곳에 위치해 있다. 국내 최초 성냥 공장인 조선인촌주식회사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한때는 도시 개발로 사라질 위기에도 처했었지만 지금은 헌책방거리 주위에 문화 사업을 활성화하면서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마을로 발돋움하고 있다. 헌책의 묵은 향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로 사진가들의 출사지로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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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기명물
국가 외교의 현장, 화도진공원
인천, 강화 일대는 이양선이 나타나던 구한말 당시 국가의 중요한 방어 거점이었다. 강화도는 두 번의 양요를 겪으면서도 조선을 쇄국상태로 지켜낸 최전방 지대였다. 또한 인천은 이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은 뒤에 비로소 문이 열렸던 항구로 일본 뿐만이 아니라 서양 함선들을 감시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강화도 조약이 발효된 뒤 이러한 감시와 방어 기능을 한층 강화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 화도진지다. 1879년 완성되었던 화도진지는 1882년에는 구미의 강국들과 조약을 맺은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한미수호통상조약을 비롯해 영국, 동일과의 조약이 여기서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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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기문화
별도 달도 보였던 그 때,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인천은 사람이 많이 모여드는 데 비해 민물을 구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우물이 있더라도 수질이 그리 좋지 않은 데다 우물이 있는 데도 그리 많지 않았다. 헌데 개항 이후 사람들이 몰려들며 전체적인 물 수요량은 늘어나니 일정량 이상의 수량을 확보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결국 1906년 대한제국 탁지부에서는 수도국을 설치하고 인천과 서울 사이의 수도관을 까는 공사에 착수했다. 결국 1909년에는 인천에 물을 공급하는 수도 시설이 들어섰으니, 소나무가 많아 송림산으로 불리던 곳도 수도국산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지금도 인천 동구와 중구지역에 물을 공급하고 있어 수도국산이라는 말이 오히려 인천사람에게는 익숙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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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기별미
그 때 그 시절 추억의 맛, 송림동 닭알탕
흔히 ‘알탕’이라 하면 명태의 알을 넣고 끓인 매운탕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인천 동구의 현대시장 길 건너 골목에 가면 조금 더 특별한 알탕을 만나볼 수 있다. 식사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이 알탕을 맛보기 위해 찾아 온 손님들로 골목이 북적인다. 개중에는 삼십 년이 넘도록 이 알탕 골목을 찾고 있다는 단골손님도 있다. 이 알탕의 정체는 바로 닭알탕이다. 닭알탕에는 그 이름 그대로 노랗고 동글동글한 닭알이 들어간다. 척 봐도 낡은 건물과 일어서면 금방이라도 머리가 닿을 듯한 낮은 천장, 시간을 그대로 간직한 붉은 간판과 추억 속 여닫이문까지. 닭알탕 골목의 오래된 주점들은 그 자리를 지켜 온 시간만큼이나 정겹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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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기탐사
인천 동구 부두, 다시 발걸음이 향한다
만석부두와 화수부두는 중구의 북성포구와 함께 인천항을 붐비게 만드는 대표적인 부두였다. 만석부두는 60년대 초까지 영종도를 왕복하는 정기성이 드나들던 곳이자 서울로 향하는 곡물을 만석이나 쌓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다. 한편 화수부두는 북성포구와 함께 어시장으로 명성을 떨쳤던 곳이다. 이렇듯 사람들의 발길이 향하던 명소는 70년대 들어 쇠락의 길을 걸었다. 주변에 공장이 들어서고 상권이 옮겨가며 점차 쇠락했던 것. 이렇게 그림자가 드리워지던 포구 지대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어항으로서의 기능을 회복하고 수산물 시장, 젓갈류 특성화 사업 등을 진행하며 신선한 생선을 사려는 사람들이 다시 발걸음을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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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기체험
신학문의 씨앗이 자라났던 인천 동구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시기, 새로운 학문을 도입하고 뒤처진 사회를 발전시켜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다양한 움직임이 있었다. 외국어를 배워 한층 더 넓은 세계를 이해하려는 사람도 있었고 서양 의학을 들여와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도 있었다. 아예 신교육 체제를 반영한 학교를 세워 미래 세대를 한층 발전시키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의 노력을 보여주는 역사유적지가 있으니 바로 인천의 창영초등학교와 영화초등학교다. 이웃해있는 이 두 학교 안에는 근대의 건축양식을 떠올리게 하는 옛 건축물들이 포진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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